산행이 취미인 이보웅 씨(77)가 22일 평소처럼 서울 은평구 불광초등학교 쪽에서 북한산 산행을 시작하며 던진 말이다. 평소 다니던 탐방로에 계단 설치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이 씨는 “경사가 심하지 않아 위험하지 않은데도 계단을 만든다”며 “북한산에 시설물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이날 북한산 향로봉, 비봉, 의상봉 등 일대를 둘러보니 곳곳에서 나무 덱(deck)은 물론이고 철제 난간, 사다리, 계단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시설이 있어야 노약자도 편하게 등산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등산객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안전상 꼭 필요하지 않은 구역까지 설치돼 북한산 경관을 해치는 덱과 사다리를 보면 ‘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과유불급 등산 편의시설
북한산뿐 아니다. 국내 대다수 국립공원 내에 목재 덱이나 철제 사다리, 돌계단 등 등반 편의시설물이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근 취재팀이 다녀온 설악산 오색약수터∼선녀탕 구간(1km) 탐방로 역시 목재 덱과 다리로 길게 이어졌다. 비룡폭포 앞까지 설치된 나무 덱, 토왕성폭포 전망대로 오르는 구불구불 뱀 모양의 계단도 보였다. 월악산 영봉에 설치된 계단과 사다리, 월출산 정상부 구름다리 등도 경관을 해치는 시설물로 꼽힌다.
26일 본보 취재팀이 국내 주요 국립공원 15곳의 현장사무소를 취재해 각 산의 정규 탐방로에 설치된 시설물을 분석한 결과 전체 탐방로(1236km) 중 목재 덱, 철제 사다리, 돌계단 등이 설치된 탐방로의 길이가 96.7km나 됐다. 전체 등산길의 약 10%에 해당한다. 월출산에는 전체 탐방로(26km) 중 약 8km, 월악산에는 88km 중 약 20km에 시설물이 깔렸을 정도. 국립공원관리공단 관계자는 “지역주민들도 ‘덱을 깔아야 더 많은 사람이 온다’며 설치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환경부에 따르면 국립공원 내 각종 시설물은 9. 10월 탐방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경우를 상정해 설치됐다. 그러다 보니 시설물이 과도한 규모로 들어선 것. 조우 상지대 관광학부 교수는 “시설물이 안전과 생태환경 보호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현재는 너무 많다”며 “미국 등 해외 국립공원처럼 자연성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 케이블카 논란도 현재 진행형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강원 양양군의 케이블카 사업은 지난해 8월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로부터 오색지구에서 끝청(해발 1480m)까지 3.5km 구간에서 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지만 시민사회의 반발로 착공이 미뤄지고 있다. 지리산 일대 지방자치단체들도 케이블카 사업을 신청했지만 환경부가 7월 이를 반려하면서 지역과 환경단체 간 갈등이 생겼다.
케이블카를 비롯해 국립공원 내 시설물 설치 찬반 논란은 현행 ‘자연공원법’의 한계 때문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법상 ‘공원 시설’ 기준은 ‘자연공원을 보전 관리 또는 이용하기 위해 공원계획과 공원별 보전 관리계획에 따라 자연공원에 설치하는 시설’(제2조)로 정의하면서도 ‘이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식으로 규정한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시행령이 변경돼 일관된 기준 없이 각종 시설물이 국립공원에 설치되는 이유다.
지자체나 지역 국회의원이 지역 내 각종 편의시설물을 설치하기 위해 예산을 따오면 장기 계획 없이 해당 연도 예산에 맞춰 국립공원 내에 시설물이 설치되기도 한다.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모임’의 지성희 위원장은 “자연공원법을 개정해 이용과 보전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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