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지순]노동 4.0 시대와 노동법의 미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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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우리가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근로기준법, 비정규직법 등을 둘러싸고 소모적인 입씨름을 하고 있는 사이에 선진국들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정보통신기술 및 디지털화를 토대로 새로운 산업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증기기관의 발명, 전기 동력과 대량생산, 컴퓨터 자동화 기술에 이어 산업 4.0 또는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업 4.0의 핵심은 디지털혁명이다. 디지털혁명은 정체 상태에 빠진 세계 경제를 다시 회복시키는 가장 강력한 추진체가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선진국들은 산업 4.0 시대를 맞이하여 시장을 선점하려고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산업 4.0의 효과로 2025년까지 자국에서만 약 300조 원에서 600조 원에 이르는 추가적인 성장이 이뤄질 것으로 내다보고 이미 수년 전부터 정부 차원에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디지털 기술이 주도할 새로운 성장동력이 장기 불황으로 접어드는 경제위기의 근원적 처방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국가적 역량 결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산업 4.0은 단순히 산업생태계의 변화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세계도 변혁시키고 있다. 각 산업혁명 단계마다 노동 방식과 내용도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초기 산업사회에서 최초의 노동자 조직이 만들어졌고(노동 1.0),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산업화 시대에는 새로운 사회문제에 대한 조직 노동자들의 압력으로 복지국가 전환이 시작되었다(노동 2.0). 그 후 노사가 서로 대등한 지위에서 사회적 파트너로 교섭과 협력을 통해 근로자의 권리를 확대해 왔으나, 다른 한편으로 세계화에 따른 경쟁 압력이 커지면서 고용 불안과 정규직-비정규직과 같은 노동시장 이중 구조가 확대되었다(노동 3.0). 이에 비해 노동 4.0 시대에는 생산 과정의 디지털 네트워크화로 인해 사람 없는 작업장이 점차 현실화되고 일하는 방식과 내용이 근원적으로 변하게 된다.

노동 4.0의 가장 큰 특징은 디지털 기술에 의하여 근로자의 시간적, 장소적 유연성이 확대된다는 점이다. 전체 생산 과정이 네트워크로 변함에 따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리고 주야간에 관계없이 언제든 기계와 사람이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장소로부터의 해방은 근로자들이 개인적 필요에 따라 근로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이 될 수 있지만 현재 고정된 근로시간제도(1일 8시간)에서는 이와 같은 탄력적이고 유연한 근로조건을 갖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획일적 규제 중심의 노동 1.0 버전의 각종 제도는 노동 4.0 시대에는 낡은 유물이 되고 있다.

노동 4.0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일(노동)과 사적 생활의 경계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문제된 바와 같이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이용하여 회사의 상사가 근로자에게 퇴근 후나 휴일 및 심지어 휴가 기간 중에도 언제든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스마트 통신기기를 이용한 업무 수행의 유연성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근로자의 개인생활에 기업의 상시적인 개입이 가능하게 된다는 점에서 노동 강도가 더 강화된다는 문제를 낳는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계도 무의미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 방식의 유연화는 ‘정규직’의 개념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생애주기적 관점에서 보면 기업의 정예부대인 정규직 근로 형태는 근로자 개인의 희망이 반영되지 않는 경직적 구조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근로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근무 형태를 설계하고 사회안전망이 뒤를 받쳐주는 ‘새로운 정규직’(뉴 노멀)의 등장이 머지않았다.

유연성과 이동성은 이제 노동 4.0 시대의 키워드이다. 노동법은 기술적, 사회적 변화와 눈높이를 같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존의 노동 1.0 규제를 대신하는 또 다른 2.0 수준의 획일적 규제를 만들어내는 노동개혁이라면 노동 4.0의 시대정신과 맞지 않다. 이제는 사업장에서 근로자와 사용자가 스스로 유연한 규제 방식을 찾아내고 만들어 가는 소통과 자율의 노사관계가 답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노동개혁이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산업 4.0과 노동 4.0에 부합하는 노동법 4.0이 우리 노동법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노동개혁#근로기준법#비정규직법#4차 산업혁명#산업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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