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너무 소중한 환자들 “오늘이 내 인생 가장 젊은 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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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 완화치료 주간]‘자원봉사 체험’ 본보 기자가 본 호스피스 병동

서울 고려대 구로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병동에서 매주 금요일 목욕 봉사를 하고 있는 본보 김수연 기자(왼쪽)가 의료진과 환자 차트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 기자 앞에 놓인 수레는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의 머리를 감길 때 쓰는 이동식 세발(洗髮)기.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서울 고려대 구로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병동에서 매주 금요일 목욕 봉사를 하고 있는 본보 김수연 기자(왼쪽)가 의료진과 환자 차트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 기자 앞에 놓인 수레는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의 머리를 감길 때 쓰는 이동식 세발(洗髮)기.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어르신, 비누칠 더 하고 싶은 곳 있으세요?”

2일 서울 고려대 구로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병동. 봉사자의 손에 몸을 기댄 채 몸을 씻던 할머니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있느라 잔뜩 눌려 있을 허벅지 아래쪽에 때수건을 넣고 문질렀다. 말 한마디 하기 힘든 환자는 그제야 시원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년 10월 둘째 주는 ‘세계 호스피스 완화치료 주간’. 일반인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호스피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지정된 홍보 주간이다. 기자는 호스피스의 세계를 직접 체험해 보기 위해 9월 초부터 매주 금요일 ‘호스피스 자원봉사’에 나섰다.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하다 보니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기자는 8월 26, 27일 양일간 교육과 면접평가를 통과한 뒤에야 자원봉사자로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 죽음이 성큼 다가온 이들의 몸

자원봉사를 하며 가장 힘든 점은 죽음을 앞둔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적나라하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는 대개 호스피스병동에 오기 전 다른 병원에서 긴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체모가 다 빠져 애처로운 상태다. 머리숱도 거의 없어 샴푸를 100원짜리 동전만큼만 짜내어 쓰면 된다. 드라이어로 말릴 필요도 없이 금세 물기가 말라 버린다.

환자들의 몸은 수술 흔적으로 가득하다. 대부분의 환자가 배에 노폐물을 빼내는 호스를 달고 있고, 수술 자국이 아물지 않아 곳곳에 밴드를 붙여 놓은 모습도 눈에 띈다. 이 병동에 있는 한 50대 난소암 환자는 아랫배에 지름 7cm짜리 구멍을 뚫어 치료를 받는 중이라 내부가 훤히 보이기도 했다.

말기 환자들의 몸을 씻는 것은 갓 태어난 생명체를 다루는 것만큼 조심스럽다. 상처 부위에 물이 들어갈까, 내 거친 손놀림 때문에 몸에 붙어 있는 호스가 빠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머리를 시원하게 감기려면 손톱으로 벅벅 긁어야 할 것 같지만, 아파하는 환자도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의자에 앉은 환자를 누군가가 씻어 주기만 할 뿐인데 그들은 꼴깍꼴깍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그만큼 체력이 바닥난 상태인 것이다.

○ ‘내일’을 알 수 없는 환자들

기자와 친했던 A 할머니(86)는 항상 기저귀를 차고 생활하는 대장암 환자다. 이 환자는 목욕하러 들어오면서 “내가 죽어야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 고생시키는데 빨리 죽어야지” 하고 긴 하소연을 늘어놓을 때가 많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기저귀 한가득 설사를 했다. 자신의 대변 묻은 몸을 남에게 맡기는 게 미안하고 민망해 “죽어야지”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풀이 죽어 있는 환자들도 개운하게 몸을 씻고 나면 태도가 달라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기 싫다던 A 할머니는 “나 살 수 있을까?” 하고 기자에게 묻는다. “내가 살아서 집에 돌아가면 밥을 해줄 테니 우리 집에 와. 이 고마움을 어찌 다 갚아”라며 손을 잡는다. A 할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병실에 가는 동안에 또다시 바지에 대변을 보는 자신의 모습에 상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럴 땐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건넨다. “할머니 오늘은 대변 색이 좋네요. 냄새도 구수하고….”

몇 주간 친분을 쌓았던 A 할머니는 결국 추석을 앞두고 퇴원을 했다. 호스피스병동에서 퇴원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남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가정 임종’을 준비하거나 다른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서다. A 할머니는 동네의 작은 요양병원으로 전원 조치가 됐다. 할머니는 “살아서 집에 돌아가면 밥을 해 주겠다”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환자들의 상태는 시시각각 변한다. 목욕을 하다 보면 지난주엔 앉아서 씻던 환자가 이젠 이동식 침대에 실려 와 욕조에 누운 채 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일부 환자는 힘이 없어 목욕하는 도중에 대변을 보기도 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급격히 변이 묽어지거나 색이 검게 변하는 이들도 눈에 띈다.

이 때문에 호스피스는 봉사시간 30분 전에 도착해 환자 차트를 일일이 살피고 메모를 해야 한다. 이 차트에는 임종이 급박한 환자,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환자, 통증이 극심해진 환자 등이 세세히 적혀 있다. 바로 어제까지 원예치료를 하며 즐거워했다고 쓰인 환자가 이튿날 새벽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자원봉사자는 이런 환자들 차트에 ‘9월 23일 임종’이라는 기록을 남긴 뒤 이를 ‘녹색 파일’에서 ‘검은색 파일’로 옮긴다.

○ 오늘이 내 생애 가장 젊은 날

고려대 구로병원 호스피스 프로그램에는 미술·원예·음악·마사지 치료, 목욕 등이 있다. 자원봉사자는 이 중 한 가지를 맡는데, 기자는 목욕 봉사를 택했던 것이다. 봉사활동을 하며 깨달은 바는 두 가지다.

첫째, 독한 치료를 해도 연명하기 힘든 경우라면 호스피스 완화 치료를 통해 차분하게 임종을 준비하도록 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기자는 대학 시절 90세가 넘은 친할아버지 기저귀를 갈고, 씻기며 보살핀 경험이 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몸에 무리가 가는 수술을 감행했는데, 이런 치료 프로그램을 미리 알았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았다.

둘째, 비록 임종을 준비하는 환자라도 이들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살고 싶어 한다는 것. 환자들은 6·25전쟁 후 나라에서 받은 표창을 머리맡에 걸어두고, 손주가 그려준 엉터리 초상화를 보며 지난날을 추억한다. ‘오늘이 생애 가장 젊은 날’임을 절박하게 느끼며 삶을 정리하는 것이다.

추석 전날엔 목욕 신청이 너무 많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50대의 여성 환자 B 씨는 “아들에게 오늘만큼은 퀴퀴한 냄새 말고 비누 냄새를 맡게 해 주고 싶다”며 목욕을 부탁했다. 말끔히 씻은 그녀는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인사말을 건넸다. “나에겐 마지막 추석이 될지 모르지만 복 받으실 거예요. 주말 잘 보내요.”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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