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눌러선 잊혀지지 않아… 슬픔 나누는 용기 내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6일 03시 00분


코멘트

[세월호 침몰]
온 국민이 트라우마… 극복 이렇게

여객선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극복법


《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 열하루째. 현재 경기 안산시 고려대안산병원에 입원해 있는 단원고의 생존 학생 74명이 이르면 다음 주부터 퇴원을 하게 된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학생들이 참사의 충격을 잘 극복해낼 수 있을까. 고려대안산병원이 지난주 생존 학생들에 대해 실시한 심리검사 결과 대부분 10점 만점의 스트레스 척도에서 중증 스트레스 단계인 평균 7.8∼8.0점을 나타냈다. 친구를 잃었다는 상실감,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S)’이다. 정신건강 전문의들은 “PTSS의 조기 치료가 필수적이지만 학생들의 치유 속도를 높이기 위해선 학교 등 일상으로의 빠른 복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눈을 감으면 ‘살려 달라’고 외치는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고려대 안산병원 응급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경기 단원고 2학년생 조모 군(17)은 침대에 차마 눕지 못한 채 한쪽에 걸터앉아 허공만 응시했다. 조 군은 이렇게 자책했다.

“배에서 탈출하기 직전 물이 반쯤 차오른 객실 안을 보니 친구가 허우적대며 ‘살려 달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몸을 못 가눌 정도로 기울어진 객실 문에서 손과 발가락 힘만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결국 친구를 구하지 못한 채 혼자 배를 빠져나오고 말았어요.”

조 군과 같은 생존자들은 살아남은 것조차 미안했다. 동료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함께 죄책감까지 겹쳐왔다. 극도의 불안 증상에 시달리는 하루하루는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세월호 침몰 직전에 극적으로 탈출한 인천 용유초교 동창생들도 실종됐던 50년 지기 친구들이 연이어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극도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환갑 여행길을 함께 떠났던 동창생 17명 중 5명만 구조된 것.

최근 동창생 장례식장에서 술에 취한 한 친구가 극적으로 생환한 친구 A 씨에게 “나 같으면 다른 친구들 구해서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A 씨는 큰 충격을 받았고, 친구들의 주검을 보니 점점 자신이 죄인처럼 느껴지게 됐다. 병원에 입원한 그는 “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친구들을 구하지 못해 후회막급이다”라며 오열했다.

여자 동창생 B 씨도 악몽에 시달려 전문의로부터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그는 배가 급격히 기울기 직전에 다른 여자 동창생 C 씨와 함께 4층 선실 내 중앙 복도를 걷고 있었다. 순간 위쪽에서 수학여행 온 고교생 2명이 떨어지면서 C 씨는 허리 부위를 크게 다쳤다. C 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전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여 승무원과 고교생 2명이 C 씨를 돌봐주기로 하고 B 씨는 갑판으로 나오다 구조됐다. B 씨는 “친한 친구를 그대로 두고 나만 살아와 면목이 없다”며 대인기피증세를 보이고 있다.

슬픔과 충격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은 생존자에 그치지 않았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는 유가족은 물론이고 시신을 무더기로 인양한 구조자, 실시간으로 참사 상황을 지켜본 사람들 모두에게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남겼다. 사람들은 미숙한 초기 대응으로 소중한 생명을 어이없이 놓치는 과정을 생중계로 접하면서 집단 트라우마 증상까지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에 직간접으로 사고를 겪은 사람들은 모두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S)을 겪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를 눈여겨봐야 한다”며 “나와 주변을 되돌아보고 서로 보듬어주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서해훼리호 생존자가 전하는 PTSS 극복 과정

“사고 후 10년간은 잔잔한 물결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어요.”

1993년 10월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서해훼리호 침몰 참사. 그 참사의 생존자 박병길 씨(72)는 사고 후유증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에서 차를 타고 20∼30분만 가면 눈앞에 나타나는 바다는 박 씨에게 아픈 기억만 떠오르게 했다.

그때, 절친한 직장 동료 부부 6쌍이 함께했던 여행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 위도를 출발해 격포항으로 가던 배는 높은 파도에 휩쓸려 45도 가까이 기울더니 그대로 침몰했다. 박 씨 부부와 다른 한 친구 부부를 제외한 8명은 모두 차가운 바닷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서해훼리호 사건의 사망자는 292명, 생존자는 70명이었다.

부안경찰서 경찰이었던 박 씨. 일에 집중하며 당시 상황을 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우면 사고 장면이 끊임없이 재생됐다. 박 씨는 “너무 괴로운 나머지 초반에는 매일 술로 지냈다”며 “처음 1∼2년이 특히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낀 박 씨는 부인과 함께 용기를 냈다. 같은 해 11월부터 박 씨 부부는 춘란을 기르고 산행도 하는 동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러나 박 씨는 “21년이 지난 지금도 혼자 조용히 있을 때면 가끔씩 사고 당시 장면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고 고백했다.

박 씨 부부와 함께 살아남은 동료 이모 씨 부부. 박 씨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이들이다. 서해훼리호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갈 당시에도 이들 네 명은 갑판 위에서 서로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박 씨는 “배가 거의 침몰할 무렵 우리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모두 바다로 뛰어들어야 했지만, 다행히 구명정을 붙들어 목숨을 건졌다”고 회상했다.

2001년 퇴직한 박 씨는 아직 직장을 다니고 있는 이 씨와 예전보다는 교류가 적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만은 형제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부인들끼리는 평소에도 자주 만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박 씨는 “사고 발생 후 구조되는 순간까지 함께했던 이 씨 부부는 힘들 때마다 큰 의지가 됐다”며 “먼저 떠난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함께 슬픔을 이겨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홍진표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함께 사고를 당한 생존자나 유가족은 서로를 가장 잘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며 “우울 증세나 사고로 인한 충격 정도가 비슷한 단계의 당사자들끼리 그룹 심리치료를 받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슬픔이 분노로 바뀌지 않도록

PTSS는 사고 이후 증상이 한 달을 넘지 않는 급성 스트레스로 그칠 수 있는가 하면 30년이 지나도록 후유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 안석균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람마다 회복 탄력성이 다르고 증상도 다양하다”며 “같은 사고를 겪어도 감수성이 예민한 10대나 여성, 노약자의 PTSS 증상이 더 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들은 ‘본인만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갖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홍 교수는 “생존자들에게 ‘네 탓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보듬어줄 필요가 있다”며 “적극적인 심리상담과 치료를 통해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고 충격에 대한 심리치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슬픔은 분노로 이어질 수 있다. 이선영 루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 심리를 연구한 ‘대형재난사고 유가족의 생활경험 연구’ 논문에 따르면, 분노를 드러낸 유가족의 경우 사회적 관계 부적응과 상실감을 느끼는 정도가 더 심했다. 이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 이사를 간 가족도 다수였다.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분노가 응집돼 표출될 땐 정부에 대한 집단적 불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어 더 위험하다. 따라서 분노 전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상담과 치료를 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초기부터 적극 치료받도록 주변에서 도와야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 따르면 치료받지 않은 PTSS는 10년이 지난 뒤에도 40%가량 회복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천적으로 생긴 트라우마는 3대에 이르기까지 유전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PTSS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때에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안 교수는 “초기에 피해자들의 PTSS 정도를 진단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치료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확한 진단을 위해선 전문의에게 최소 한 시간 이상은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씨는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당시만 해도 심리치료를 전담하는 기관이나 전문의는 서울 몇 곳을 제외하곤 없었다”며 “주변에서 누가 권하는 사람도 없었고 심리상담 전문의를 따로 찾아갈 생각도 미처 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조기에 심리치료를 받았더라면 회복시간을 더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사실 상담이 필요한 피해자들도 본인 스스로 심리치료를 받으러 가는 경우는 드물다. 박 씨는 “살아남은 사람들은 ‘혼자만 살았다’는 죄책감, 동료를 잃은 슬픔 등으로 스스로가 심리상담에 선뜻 나서기가 어렵다”며 “전문의, 봉사자들이 먼저 세월호 침몰 사고 피해자들을 찾아가 손을 내밀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한편 이번 참사를 겪은 생존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유가족뿐만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서 장기간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는 잠수부들의 PTSS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미국정신건강학회 발표 자료에 따르면, 재난구조작업에 참여한 잠수부들은 최대 40% 정도 PTSS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조작업 도중 발견하는 부패한 시신들을 마주할 때의 충격 등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홍삼남 제주의료원 진료부장(신경과 전문의)은 “이제 선체 인양 시기까지 장기수색대비책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현재 600여 명이 넘는 잠수부가 투입돼 있는 만큼 잠수부들의 심신을 전담할 의료 인력 또한 충분하게 파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PTSS·Post Traumatic Stress Syndrome) ::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으로 입은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트라우마(trauma)라고 한다. PTSS는 트라우마가 직접적 원인이 된 일련의 정신질환군(群)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보다 폭넓은 개념이다. 트라우마를 앓았던 당시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공포에 시달리고 우울증 공황장애 알코올사용장애 등을 동반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큰 지장을 주기도 한다.

최지연 lima@donga.com·이철호 기자
안산=서동일 기자
#세월호#서해훼리호#ptss#심리치료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