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억 횡령혐의에도 ‘결백한 분’ 강변, 학부모들 “애들 손에 들려보내…” 경악
송파경찰서-동부지검에 진정서 제출… 경찰 “자료 보강되는대로 영장 재청구”
원장 vs 학부모 탄원서
보조금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서울 송파구의 한 어린이집 원장이 지난달 7일 원생들을 통해 학부모에게 보낸 탄원서(위쪽)와 이에 분노한 학부모들이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며 송파경찰서장 및 서울동부지검장 앞으로 보낸 탄원서.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6월 7일 이모 씨(41)는 네 살 아들이 어린이집에서 갖고 온 ‘탄원서’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탄원서에는 ‘○○○ 원장은 아이를 사랑하는 교육자이자 아이들의 성장을 책임지는 가족과 같은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원장이 마치 비리가 있는 것처럼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탄원인의 이름과 서명 칸은 비어 있었다. 원장이 부모 서명을 받아오라고 아이들 손에 들려 보낸 탄원서였다.
5월 27일 서울 송파경찰서의 어린이집 비리 사건 중간수사 결과 발표 이후에도 적발된 원장들이 반성은커녕 법률적 허점과 아이를 맡겨둔 학부모의 처지를 악용하고 있다.
이 씨 아들이 다닌 서울 송파구의 어린이집 원장(52·여)의 횡령 금액은 6억4000만 원으로 적발된 원장 중 두 번째로 많았다. 학부모들에 따르면 급식과 간식은 부실했고 특별활동업체의 편의를 봐주느라 아이들은 뒷전이었다. 학부모 A 씨는 “유기농비까지 따로 받아놓고 어떤 날은 아이들에게 4cm 오이 조각을 4등분해 한쪽만 주기도 했다”며 “우리 아이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아이들 모두 하루 종일 배가 고프다고 했다”고 토로했다. 보통은 점심시간인 12시 반에 특별활동업체를 교실에 들이느라 밥을 천천히 먹던 아이들은 복도에 내몰려 먹어야 했다. 참다 못해 이 사실을 알린 보육교사는 일을 그만뒀고 해당 아이 학부모는 어린이집을 옮겼다.
하지만 원장은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온 후에도 당당했다. 학부모 B 씨는 “뉴스를 보고도 ‘설마’했다. ‘우리 어린이집은 아닙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했다. 원장은 부모들 앞에서 “내가 그 돈 받아서 돌려 쓴 것 맞다. 그런데 어차피 법적으로 죄도 안 되고 구속도 안 될 테니 걱정 마시고 집에 돌아가라”고 말했다. B 씨는 “원장이 아이 손에 들려 보낸 탄원서를 보는 순간 ‘우리가 을이구나’라고 생각했다”며 “어린이집을 옮기려 해도 다른 어린이집 대기 순번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고 당장 아이를 맡길 곳도 없다”고 말했다.
분노한 부모들은 지난달 21일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학부모 60여 명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는 ‘○○○ 엄마’ ‘○○○ 아빠’와 같이 아이들의 이름으로 “여기 들어올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기운 냅시다” “저도 지금까지는 소극적이었지만 이제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적어도 우리 애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합시다”와 같은 글들이 쇄도했다. 비대위는 지난달 송파경찰서장과 동부지검장 앞으로 진정서 200부를 제출했다. 이달 2일에는 학부모 25명이 재차 탄원서를 냈다. 원장이 보냈던 탄원서는 자료로 첨부했다. 원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학부모들에게 탄원서를 보낸 사실은 인정했지만 자신이 받고 있는 혐의에 대해서는 “아직 경찰 조사 중인 상황이고 아무것도 확인된 게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경찰은 6월 초 해당 원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로부터 판례 등 관련 자료를 보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송파서 지능팀장 민종기 경위는 “어린이집 대형 비리는 기존 판례가 거의 없어 법률적 판단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학부모 이 씨는 “원장들이 민간어린이집 관련 기준이 허술한 것을 틈타 도덕적 선을 넘나들고 있다. 이번 사건도 솜방망이 처벌로 끝난다면 우리 아이들은 다시 부실 어린이집의 볼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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