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시켜줘 고맙다니요? 되레 제가 힘을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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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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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의예과 안병윤 씨의 행려환자 목욕봉사 ‘인생수업’

21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병원에 목욕봉사를 나온 서울대 의예과 1학년 안병윤
씨(왼쪽)가 행려 환자 장진석(가명) 씨를 씻긴 뒤 활짝 웃고 있다. 고현국 기자mck@donga.com
21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병원에 목욕봉사를 나온 서울대 의예과 1학년 안병윤 씨(왼쪽)가 행려 환자 장진석(가명) 씨를 씻긴 뒤 활짝 웃고 있다. 고현국 기자mck@donga.com
환자복을 벗기자 앙상하게 뼈만 남은 팔다리가 드러났다. 누렇게 뜬 피부에는 군데군데 땟자국이 눌어붙어 있었다. 복수(腹水)가 가득 찼는지 배는 풍선처럼 불룩했다. 환자가 차고 있는 성인용 기저귀를 벗기자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기저귀를 벗겨 쓰레기통에 넣는 동안 안병윤 씨(19)는 한 차례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환자가 불편함을 느낄까 봐서요. 저도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어요.”

21일 오후 8시경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병원. 노숙인 환자들이 모여 있는 33병동에서 안 씨의 자원봉사는 만성 간질환 환자인 노숙인 장진석(가명·45) 씨의 기저귀를 벗기는 것으로 시작됐다.

올해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한 안 씨는 4월부터 매주 금요일 밤마다 33병동에서 목욕 봉사를 하고 있다. 6개월째 자원봉사를 하고 있지만 직접 행려 환자의 몸을 씻긴 일은 3번밖에 없어 아직도 익숙지 않다. 봉사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의과대학의 정책이었다. “의사가 되려면 환자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강대희 의과대학장의 의지에 따라 의예과 신입생 76명은 본과에 진학하기까지 2년간 60시간의 병원 봉사활동을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33병동은 보라매병원 안에서도 특별한 곳이다. 불결한 위생환경과 알코올의존증 등으로 건강이 망가진 노숙인과 무연고 환자가 하루에도 2, 3명씩 이송돼 치료를 받는 폐쇄병동이다. 의료복지의 사각에 놓인 소외계층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인 셈. 안 씨는 내원객 안내, 채혈실 보조, 응급실 지원 등 다양한 업무 가운데 행려 환자 목욕봉사를 자원했다. ‘이왕이면 가장 궂은일을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병원 사회사업실은 당초 가을학기에는 대학생의 목욕봉사 신청을 받지 않기로 했지만 “더 많이 배우고 싶다”는 안 씨의 강한 요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사회로부터 오랜 기간 격리된 노숙인 환자는 낯선 간병인과 봉사자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봉사자들이 자신을 씻기는 동안 한마디 말없이 몸을 웅크리거나 아이처럼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환자도 있다. 이들의 불편한 몸을 돌보며 상처받은 마음을 함께 어루만지는 일도 봉사의 일부분이다. 안 씨는 ‘한 걸음 먼저 다가서는 배려심’을 열쇠로 꼽았다.

“아버지께서 집에 온 손님이 마음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어요. 환자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먼저 다가가는 진료와 봉사를 하고 싶어요.”

그는 봉사를 통해 자신이 환자에게 베푸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간다고 말한다.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다. 안 씨는 “노숙인 환자들은 일반인이라면 아주 뜨겁게 느낄 물 온도라야 차갑지 않다고 느낀다”며 “물 온도를 맞추고 눈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는 일, 옷으로 알몸을 가려주는 일도 놓치기 쉬운 기본적 배려”라고 설명했다. 환자의 병만 고치는 차가운 의사가 아니라 마음까지 어루만질 수 있는 따뜻한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도 33병동의 자원봉사 덕분이다.

장 씨의 목욕은 30분 만에 끝났다. 안 씨가 갈아준 새 기저귀를 차고 깨끗한 침대 시트 위에 누웠다. 장 씨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참 시원해요.”

안 씨는 “환자들은 고맙다고 하지만 사실 힘을 얻은 것은 나 자신”이라며 “목욕을 끝내고 나면 마치 내가 목욕을 한 것처럼 피로가 싹 가신다”고 말했다.

고현국 기자 mck@donga.com
#의대생#목욕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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