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민심, 현장을 가다]<1>분당 중산층 ‘이유있는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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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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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주부 “물가 뛰는데 집값은 하락… 난생처음 투표장에”

경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살고 있는 주부 이모 씨(41)는 4·27 재·보선 때 난생처음 투표장으로 향했다. 이 씨의 투표구인 ‘분당을’ 지역은 여당후보가 당선되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그동안 굳이 투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를 투표장으로 이끈 것은 팍팍해진 생활수준과 아파트 가격 하락이다. 30평형대에서 40평형대로 옮기고 싶었지만, 이미 대출한도는 꽉 차버렸고 살고 있는 아파트는 수천만 원 떨어졌다. 남편 월급은 그대로인데, 물가가 올라 생활수준을 낮춰야 할 형편이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 씨는 “내 또래 학부모들도 비슷한 심정으로 투표장으로 향했다”며 “아직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중산층 생활을 유지하기가 요즘은 너무 힘들다”고 털어놨다.

전통적으로 보수 중산층이 모여 살고 있다는 분당을 4·27 보선에서 손학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이후 정치권과 이명박 정부가 심각한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무엇보다 중산층 민심의 변화를 읽지 못한 것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선거 2주 후 취재에 응한 분당의 중산층들은 살림살이가 쪼그라드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나는 이제 중산층이 아니다”라며 박탈감을 토로했다. 문제는 중산층의 위기감이 분당 한 지역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 상대적인 박탈감에 곤혹스러운 중산층


분당에서 만난 대학교수 배 씨는 중산층의 위기를 꺼내자 “서민층이나 저소득층보다 중산층이 더 살기 어려워졌다는 말이 아니다”고 전제하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요즘 그가 동창회나 모임에 가면 화제에 가장 많이 오르는 것이 ‘나라 경제는 좋아졌다는데 우리는 뭐냐’는 하소연이다. 배 씨만 하더라도 부모, 자식들을 부양하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발표한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에 따르면 1분기 GDP는 지난해 동기 대비 4.2%, 직전 분기보다 1.4% 각각 증가했지만, 실질 구매력을 나타내는 국내총소득(GDI)은 직전 분기 대비 0.6% 줄면서 27개월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국가는 부강해지는데 국민은 쓸 돈이 줄고 있다는 의미다. 한은이 내놓은 2010년 국민계정을 보더라도, 노동소득분배율이 60% 밑으로 떨어져 6년 만에 최저 수준을 나타냈다. 기업들이 창출한 부가가치 가운데 근로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로, 성장의 과실이 가계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순권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 영업이익이라는데 나의 삶은 뭐냐는 의문 때문에 중산층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며 “금융위기 이후 저소득층에 예산 지원을 늘려 하위층의 소득은 다소 개선됐지만 중산층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실제 분당에서 동아일보 취재팀이 인터뷰를 한 분당시민 10명은 소득수준이나 교육 등 조건을 볼 때 중산층으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중 3명은 “나는 중산층이 아니다”고 답할 정도로 심리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에는 부동산 가격의 하락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분당에서 만난 회사원 이준태 씨는 “예전에는 부동산자산이 부채보다 높게 평가돼 자신을 중산층으로 분류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하지만 이제는 대출이자 때문에 가처분소득이 감소하는데 집값은 계속 떨어지고, 그렇다고 팔지도 못하는 ‘하우스 푸어(House Poor)’들이 늘면서 중산층 심리가 급격히 악화됐다”고 말했다.

○ 무너지는 사회 안전판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한 아파트상가에서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운영한 남모 씨(43)는 식구가 4명인 전형적인 중산층 가장이었다. 월 소득도 한때 600만∼700만 원에 이를 정도로 남부럽지 않았지만, 인근에 대형 고급 식당이 속속 들어서는 등 경쟁이 격화되면서 결국 가게를 접고 말았다.

중산층은 통상 가구 월평균 소득의 50∼150%인 계층으로 분류된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월평균 가구소득이 363만2000원인 점을 감안하면 181만(50%)∼544만 원(150%)에 들어가는 가구는 중산층으로 볼 수 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통계청 자료를 토대로 2003∼2009년 중산층 가구의 비중을 분석한 결과, 2003년 60.4%를 차지했던 중산층 가구 비중이 2009년 55.5%로 6년간 4.9%포인트 감소했다. 이 기간 중산층 소득 증가율도 평균소득 증가율(7.4%)의 절반에 못 미치는 3.2%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남 씨와 같은 자영업자의 몰락과 급속한 고령화가 중산층의 붕괴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또 베이비 부머들이 제대로 노후 대책을 준비하지 못한 채 은퇴하면서 ‘노인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가구가 많은 것도 문제다.

성명재 한국조세연구원 공공정책연구팀장은 “소득분배 격차가 커지는 것은 소득이 없는 은퇴자들이 급격히 늘고 있기 때문”이라며 “고령화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만큼 중산층의 약화는 어느 정권도 쉽게 대처하기 어려운 과제”라고 말했다. 김용기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중산층은 ‘사회의 허리’로 불리며 사회 안정에 절대적인 안전판 노릇을 해왔다”며 “하위층으로 전락하는 중산층이 늘어나면 사회통합에 문제가 생기고 정치 경제적인 리스크도 커진다”고 지적했다.

중산층의 존재는 내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민심 읽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정치권과 이명박 정부의 운명을 가름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미래와도 직결되어 있다. 박성민 민컨설팅 대표는 “최근 한국 정치권은 이념 경쟁이 격화되면서 누구도 중산층을 위한 정당이라고 하지 않는다”며 “중산층을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으니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며, 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정치적 사회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
성남=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 팍팍한 삶, 왜? ▼
성장 온기는 위에서 천천히 내려가고 물가 고통은 밑에서 빠르게 퍼져나가


지난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두 번째로 높은 6.2%로 8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넘어서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3년 만에 다시 국내총생산(GDP) 1조 달러,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중산층과 서민층의 생활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보다 팍팍해졌다. 빠른 경제회복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지난해부터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임금 근로자들의 실질적인 소득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의 온기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속도는 더딘 반면 고물가의 고통은 저소득층부터 빠르게 체감하고 있다.

실제로 시간당 임금 상승률은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3.4%에 그쳤다. 임금 상승률은 연평균 1.1%를 약간 넘어선 것이다. 같은 기간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3%에 이르는 것을 감안하면 경제성장 속도에 비해 소득 증가 속도가 뒤처지고 있다. 반면 물가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보다 빠르게 오르고 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5%로 2005∼2007년 연평균 2.5%보다 1%포인트나 높아졌다. 결국 지난 3년간 임금 근로자의 소득증가율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실질소득은 매년 감소한 셈이다. 예를 들어 매달 벌어들이는 임금은 300만 원, 지출은 200만 원인 가구의 경우 3년 동안 임금은 10만 원가량 올랐지만 물가 상승으로 지출은 약 22만 원이나 늘어났다.

특히 소득에 비해 지출이 크게 늘어나는 현상은 저소득층일수록 더 심각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가구를 소득수준에 따라 5등분했을 때 가장 낮은 1분위(하위 20%) 가구의 세금을 제외한 가처분소득은 월평균 97만4000원, 지출은 115만1000원으로 가계수지는 약 17만7000원 적자를 봤다. 1년 전 가계수지(17만8000원 적자)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2분위 가구(하위 20∼40%) 역시 지난해 가계수지는 21만6000원 흑자로 1년 전보다 3만4000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반면 소득이 가장 높은 5분위(상위 20%) 가구의 지난해 가계수지는 193만4000원 흑자로 1년 전보다 7만 원가량 흑자 폭이 커졌다. 고소득층일수록 소득이 지출보다 더 크게 증가한 것이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물가가 생필품 위주로 크게 오르면서 저소득층의 체감물가 상승은 고소득층보다 훨씬 높았다”며 “서민경기 회복이 더딘 상황이기 때문에 물가 상승에 따른 부담은 저소득층에 더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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