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공존을 향해/1부]<2>거리로 내몰린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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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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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돌린 세상 탓에 어제는 꿈을 잃었지만 따스한 쉼터 덕에 오늘은 꿈을 찾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 이런 현실

지난해 6월, 열다섯 살 안팎의 남녀 청소년들이 또래 여자친구를 빈 집에 4일 동안 감금한 채 폭행, 살해한 뒤 한강에 유기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은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한강에서 수심이 가장 깊다는 양화대교 부근에 시신을 내던지는 등 엽기적인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에 연루된 청소년들은 모두 결손 가정의 아이들. 학교를 중퇴하거나 장기결석 상태에서 집을 나와 떠돌다가 서로 알게 된 사이였다.

거리로 나온 아이들이 사회와 단절된 소외감과 욕구불만을 공격적 범죄로 표출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들의 문제를 여전히 일부 일탈한 개인의 문제로만 여긴 채 뒷짐을 지고 있다.

○ ‘꿈’마저 잃어버린 아이들

“다섯 살 때 엄마가 언니를 데리고 떠난 이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하나뿐인 언니는 얼굴과 나이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지현(가명·19)이의 엄마가 떠난 뒤 아빠는 재혼을 했다. 새엄마가 생겼지만 지현이와는 갈등뿐이었다. 아빠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해본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지현이는 열두 살 때 가출을 시작했다. 거리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고 담배도 피웠다. PC방에서 만난 언니들이 ‘조건 만남’을 하는 것도 지켜봤다. 가출과 귀가를 반복하며 몇 년이 흘렀다. 학교에서는 퇴학을 당했고 꿈도 희망도 모두 거리에서 사라졌다.

지현이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고, 엄마와 손잡고 시장 나들이를 하고, 지루해 보일 정도로 심심해 보이는 평범한 생활이 부러웠다”고 말한다.

더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열일곱 살쯤. 지현이는 ‘큰엄마’를 만났다. 큰엄마는 지현이가 쉼터에 처음 온 날부터 지현이를 ‘딸’이라고 불렀다. 또래와 다른 삶을 살아온 지현이로서는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 지현이의 새로운 꿈

지현이에게 평범한 삶과 꿈을 찾아준 큰엄마는 서울 은평구 응암동 어울림청소년쉼터의 김인자 소장이다. 지현이를 포함한 쉼터의 아이들 7명은 모두 그녀를 큰엄마라고 부른다. 그녀는 1년 365일 이곳 쉼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토록 꿈꾸던 평범한 삶을 되찾은 지현이는 제빵사가 되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지난해 수도권의 한 대학의 제빵학과에 합격도 했다.

김 소장이 아이들에게 큰엄마라면 그녀의 남편 조효철 씨는 ‘큰아빠’였다. 큰아빠는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등산을 다녔다. 여름방학 때는 꼭 몇 주씩 시간을 내 지리산 종주를 한다. 지리산 종주는 아이들에게 ‘하면 된다’는 성취감을 맛볼 수 있게 해줬다. 지현이가 제빵사라는 꿈을 갖게 된 것도 지리산 종주를 하고나서다.

지현이는 중장기 쉼터에서는 최대 2년밖에 머물 수 없다는 현행법에 따라 다음 달이면 쉼터를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야 한다.

“하루 6시간 제과점 아르바이트로는 500만 원가량의 등록금과 입학금을 마련하는 것도 걱정이지만 다시 가족의 품을 떠나 혼자된다는 게 가장 무서워요….”

○ 거리에서 ‘가족’을 찾아

지현이처럼 새로운 가족을 만나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돌아갈 가정이 없는 아이들인 데다 쉼터 인원도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동준(가명·18)이는 세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해 초등학교 2학년까지 보육원에서 자랐다. 잠시 이모 집에 머물다 4학년 때부터는 아빠와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코올의존증 환자인 아빠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1년 전 집을 나왔다. 최근 아빠는 동준이에 대한 친권조차 포기했다. 동준이는 요즘 세차장과 주유소 등에서 일을 하며 고시원에서 다른 가출 청소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새엄마와의 갈등 끝에 집을 나온 현수(가명·18)도 돌아갈 집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2008년 현수가 가출한 직후 가족들이 모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이렇게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들은 거리에서 처지가 비슷한 아이들끼리 모여 새로운 가족인 이른바 ‘팸(family)’을 이뤄 살아가기도 한다.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열 명까지 팸의 구성원들은 고시원이나 모텔 등을 함께 사용하며 몰려다닌다.

청소년이 길에서 팸을 찾는 이유에 대해 신림청소년센터의 박진규 실장은 “가출 청소년의 상당수는 가정이 해체됐거나 방임으로 정상적인 가족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며 “거리로 나온 아이들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끼리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 미국에선 “청소년 자립 돕자” 기술 재교육 강화 ▼
영국에선 “가정의 해체 막자” 갈등 상담에 역점


■ 이런 대안

국내 청소년들은 열 명 중 한 명꼴로 가출을 경험하고 네 명꼴로 가출 충동을 느끼고 있다. 또 가출의 주된 원인은 가정불화, 가정 해체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9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청소년 975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가출 경험 청소년이 11.6%에 이른다. 가출 충동을 느낀 청소년은 42.9%였다. 지난해 여성가족부 청소년쉼터 실태조사 결과에서는 부모 간의 불화(21.3%), 부모의 폭행(13.0%), 부모의 지나친 간섭(10.3%) 등 가족적 요인(59.8%)이 가출의 주된 원인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가출 청소년을 일부 문제아의 일탈 행동으로만 보고 있다. 가출한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만 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청소년들의 반복적인 가출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신림청소년센터의 박진규 실장은 “가출 청소년의 절반은 가정이 해체됐거나 신체 학대, 방임으로 정상적인 가족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며 “무조건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대세인 현재의 청소년 정책으로는 가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비슷한 문제를 먼저 경험한 서구 사회에서는 가출한 청소년들에게 자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동시에 예방과 조기 개입을 중시하고 있다.

미국은 1980년 ‘가출 및 홈리스 청소년법(The Runaway and Homeless Youth Act)’을 마련했다. 이 법은 가출 청소년에게 일시적인 쉼터를 제공하기보다 청소년의 자립과 재교육을 강화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췄다. 가령 뉴욕 주는 장기 가출자의 경우 5명 정도의 청소년이 전문가의 감독 아래 독립된 공간에서 기술 등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영국은 청소년 가출의 주된 원인인 가정 해체를 예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2005년 3월 청소년 홈리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정된 가정’을 청소년 정책의 모토로 내걸었다. 위기 청소년과 가족 간의 문제가 가출로 이어지지 않도록 6∼8주에 걸쳐 전문 상담가들이 아이들과 가정의 갈등을 중재한다. 청소년과 가족 구성원 간의 대화를 돕고 가정의 해체를 방지하는 예방책인 셈이다.

한국의 경우 가출은 곧 학업의 중단을 의미한다. 가출 청소년 당사자들도 대부분 공부에 뜻이 없고 주변에서도 그들에게 공부할 여건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호주는 가출 청소년이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학교는 학생들의 심리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파트타임 수업 등록을 허용하고 가출 청소년들의 숙제를 돕기 위한 보충 학습도 제공한다. 일부에서는 학생의 중도탈락을 막기 위해 맞춤형 개별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출 청소년을 ‘선도의 대상’이 아닌 보호와 서비스의 대상, 즉 복지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가출 청소년이라는 말 대신 ‘가정 밖의 청소년’이라는 개념의 전환이 있어야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현재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저소득층 청소년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구직 지원책인 ‘뉴스타트 프로그램’에 집을 나온 청소년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 대상을 넓힐 필요도 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백혜정 박사는 “가출 청소년을 치료하고 교육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사실상 전무하다”며 “단순히 아이들을 먹이고 재워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치료형 쉼터가 도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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