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몸 어르신 ‘기부 천사’ 9명 생애 첫 가을나들이

  • 동아일보

63빌딩 가고… 유람선 타고…“죽기전 여행 소원 풀었구먼”

‘기부천사’ 어르신들이 1일 하나투어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주최한 나들이에 초청받아 서울 여의도 63빌딩을 구경하고 한강유람선을 탔다. 63빌딩 지하 3층 ‘왁스뮤지엄’에 간 어르신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의 밀랍인형 옆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기부천사’ 어르신들이 1일 하나투어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주최한 나들이에 초청받아 서울 여의도 63빌딩을 구경하고 한강유람선을 탔다. 63빌딩 지하 3층 ‘왁스뮤지엄’에 간 어르신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의 밀랍인형 옆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죽기 전에 이스라엘 여행을 한 번 하고 싶어서 돈을 모았는데 TV 보니까 불우이웃 돕기를 한다잖아요. 그래서 여행 포기하고 거기에 돈을 주고 왔어.”

올해 83세인 박부자 할머니는 지난해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서 열린 불우이웃을 위한 쌀 모으기 행사장에 들러 100만 원을 슬쩍 두고 왔다. 노쇠한 몸으로 3년간 폐지를 주워 모은 돈이었다. 50여 년 전 노름에 빠져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간 남편과 헤어진 뒤 자식도 없이 줄곧 혼자 생활해온 박 할머니가 ‘죽기 전에 여행이나 한번 해보자’며 모은 돈이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가 1일 뜻밖의 여행 선물을 받았다. 다른 노인 8명과 함께하는 서울 나들이였다. 하나투어와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 열매)가 함께 마련한 ‘기부천사 어르신과 함께하는 행복한 가을 나들이’였다.

어려운 형편인데도 몸소 기부를 실천해온 노인 9명이 생애 처음이거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에 나섰다. 환갑을 넘었거나 많게는 미수(米壽·88세)를 바라보는 이들은 대부분 국가로부터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고 있는 저소득층 홀몸노인들. 하나투어와 사랑의 열매는 지난해부터 이 행사를 공동으로 마련하고 있는데, 관광상품을 파는 여행사와 복지사업을 하는 모금회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합쳐 재능 기부를 하는 셈이다.

이날 노인들은 서울 여의도 63빌딩을 둘러보고 한강유원지에서 유람선을 탔다. 주최 측은 당초 해외여행을 계획했지만 참가 노인들의 건강문제 때문에 여행지를 서울로 바꿨다고 했다. 인생의 절반을 서울에서 보내면서도 63빌딩을 가본 적이 없었다는 박 할머니는 여행 내내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63빌딩 지하 수족관을 둘러보며 연방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어요”라고 했다.

박 할머니의 집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한 쪽방촌. 22년간 정을 붙였던 종로구 내수동 쪽방촌이 철거되면서 10년 전 이곳으로 옮겼지만 조만간 이곳도 철거돼 또 다른 쪽방촌을 알아봐야 할 상황이다. 식당보조, 환경미화원, 폐지수집원 등을 하며 생활비를 모았지만 나이 여든을 넘기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이제 그마저도 못 하고 정부가 주는 월 40여만 원의 기초생활수급비로 살아간다. “그래도 월 16만 원씩 꼬박꼬박 저축하고 있어. 내가 죽으면 전세금 등 전 재산을 사랑의 열매에 기부하기로 했거든.”

이번 서울 나들이에 참가한 노인 가운데 박 할머니 같은 ‘유산 기부자’는 총 3명. 모두 국가로부터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으면서도 복지관을 돌며 봉사활동에 열심인 홀몸노인들이다. 원래 6명이 참가하기로 했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고령의 유산기부자 3명이 사망했다.

그 대신 일반 기부자 5명이 여행을 함께했다. 박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기초생활수급자인 동갑내기 이명희 씨(83·여). 2005년부터 매월 사랑의 열매에 정기 기부금을 내고 있는 이 할머니에게는 수족관이 낯설지 않다. ‘마음으로 품은 손녀’와 함께 자주 왔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 고교 2학년이 되는 손녀는 17년 전 한 젊은 고등학생 커플이 낳은 아이다. 부모의 손을 떠나 복지관에 온 아이를 당시 봉사활동을 하던 할머니가 데려왔다. 손녀와 자주 왔다는 수족관을 나와 지하 3층 왁스뮤지엄에 들어선 할머니는 내내 “아유 세상에”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할머니는 육영수 여사의 왁스인형 앞에서 사진도 찍고 손과 한복을 만져보며 “이런 것은 처음 봤는데 너무 신기하다”고 말했다.

“나눔이라는 게 할 때도 참 기쁜 건데 나눔을 많이 하셨던 분들과 만남을 갖는 일도 정말 즐겁네요.” 서울 중구 환경미화원이었던 김영백 씨(67)가 말했다. 20년 넘게 생업과 각종 기부·봉사활동을 겸하며 살아온 김 씨는 한 번도 관광여행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다. 그는 “훌륭한 분들과 큰 즐거움을 함께하니 더 열심히 베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웃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