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저가 화장품가게에서 구입한 파우더에요. 이걸 얼굴 전체에 얇게 펴 바르면 얼굴색이 창백해져요. 그 다음엔 새끼손가락에 파우더를 묻혀 입술에 골고루 발라요. 그럼 핏기 없는 얼굴이 완성되죠. 재빨리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어지럽다’고 말씀드려요. 친구가 전수해 준 방법인데, 이렇게 하면 야자(야간자율학습) 땡땡이 성공률 100%예요.”
고2 안모 양은 중간고사 직후 환자처럼 보이기 위해 위장을 한 적이 있다. 시험이 끝난 다음날만큼은 야자에서 벗어나고 싶어 감행한 돌발행동이었다.
안 양은 “슬럼프에 빠졌을 때나 학업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땐 오히려 한 박자 쉬어가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생각한다”면서 “중고교생이라면 누구나 1년에 한두 번쯤 이런 거사를 치른다”고 귀띔했다.
바쁜 학교, 학원 스케줄에 쉴 틈 없는 중고교생은 간혹 ‘일탈’을 꿈꾼다.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시험 뒤풀이’를 공모한 날, 인근 학교의 축제 기간, 인기 연예인의 전국투어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 돌아오면 일부 학생은 ‘002(땡땡이) 작전’을 개시한다.
가장 흔하지만 잘 통하는 방법은 바로 꾀병. 복통, 치통, 중이염, 빈혈 등 외견상으로는 증세를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병명들이 애용(?)된다.
고1 김모 양도 최근 연예인들이 대거 출연한다는 시 주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고열 환자로 변신했다.
“복도에 비치돼 있는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물통에 받은 뒤 그걸로 얼굴을 5분간 문지르면 얼굴이 확 달아올라요. 이 때 재빨리 선생님을 찾아가 열이 난다고 말씀드리죠. 슬쩍 ‘감기인지, 신종 인플루엔자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선생님께서 바로 허가증을 내주세요.”(김 양)
감염 위험이 높은 눈병도 자주 쓰이는 변명거리 중 하나다. 졸음방지용으로 들고 다니던 물파스를 눈가에 살짝 바르면 진짜 눈병에 걸린 것처럼 빨갛게 충혈 된다. 단 한 시간이라도 꿀맛 같은 휴식을 얻을 수 있다면 잠깐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교복치마의 밑단을 살짝 뜯어낸 뒤 “세탁소가 문을 닫기 전에 교복을 맡겨야 한다”고 말하거나 “은행 업무가 끝나기 전 엄마가 주신 통장으로 학원비를 찾아야 한다”는 식으로 선생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석식시간에 자기 책상을 옆 반에 옮겨 놓은 뒤 조용히 자취를 감추는 학생도 있다.
할아버지 제사, 할머니 생신, 삼촌 결혼식 같은 가족행사 또한 단골메뉴. 목요일 또는 금요일 방과 후 야자에서 벗어나려는 학생들은 최근 주중 저녁에 결혼식을 올리는 트렌드를 포착해 이를 이용한다.
휴대전화 문자서비스로 학생의 출결 상황을 부모님께 알리는 학원 수업은 빠지기 어렵지 않을까? 방법은 있다. 미리 학원에 전화를 걸어 “오늘 학원에 못 간다”고 한다. 십중팔구 학원에선 “늦게라도 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이 때 학교 담임선생님과 입시 상담을 한다거나 학교행사 핑계를 대며 “좀 늦어질 것 같지만 늦게라도 가겠다”고 말한다.
고3 박모 군은 “이미 학생이 지각할 것을 알고 있는 학원에선 부모님께 문자를 아예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면서 “수업에 빠진 후 몇 달간은 다음 기회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성실히 공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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