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엔 칼-주머니엔 가스총… ‘킬러’ 흉내

  • 입력 2008년 10월 21일 02시 59분


불탄 고시원 30대 남성 정모 씨가 “세상이 살기 싫다”며 20일 자신이 거주하던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D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불을 피해 나오는 사람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6명이 사망했다. 사고가 난 고시원에서 소방관이 연기를 빼기 위해 창문을 부수고 있다. 변영욱 기자
불탄 고시원 30대 남성 정모 씨가 “세상이 살기 싫다”며 20일 자신이 거주하던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D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불을 피해 나오는 사람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6명이 사망했다. 사고가 난 고시원에서 소방관이 연기를 빼기 위해 창문을 부수고 있다. 변영욱 기자
검은색 옷-모자-고글 착용하고 회칼 휘둘러

“항상 투덜대며 로또에 집착… 감정기복 심해”

희생자 대부분은 형편 어려운 中동포-일용직

20일 발생한 고시원 흉기난동 사건은 ‘묻지마’ 범행에 잔혹성까지 더해 충격을 주고 있다. 사건 피의자 정모(31) 씨는 흉기를 미리 준비하고 검은색 ‘킬러’ 복장까지 갖춰 입는 치밀함을 보였다.

▽복장 갖추고 흉기 휘둘러=서울 강남구 논현동 D고시원에서 5년째 살고 있던 정 씨는 20일 이른 아침 평소 입지 않던 검은색 옷에 검은색 모자, 검은색 고글까지 착용했다.

잠시 후 정 씨는 자신의 방 침대에 휘발유를 뿌리고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이 과정에서 손에 화상을 입어 더욱 흥분한 그는 평소 방에 숨겨둔 과도 2개를 칼집에 넣어 다리에 차고 가스총을 주머니에 넣은 후 회칼을 들고 복도로 나섰다.

5분 뒤 3층이 연기로 가득 차자 다른 방에 머물던 대여섯 명이 놀라 복도로 뛰쳐나왔다. 검은 연기 속에서 더 잘 보기 위해 머리에 야간 등산용 플래시까지 착용한 정 씨는 그들에게 사정없이 회칼을 휘둘렀다.

10여 분간의 칼부림에 이어 4층으로 올라간 정 씨는 연기 속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오자 이들을 향해 다시 칼을 겨눴다. 너덧 명은 정 씨의 칼에 쓰러졌고, 칼을 피해 창 밖으로 몸을 던진 사람도 있었다.

고시원 앞을 지나던 목격자 송승영(35) 씨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 돌아봤더니 아주머니 2명이 4층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한 명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한 명은 다행히 아래층 베란다로 떨어졌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범행을 마친 후 정 씨는 자신도 피해자인 것처럼 숨었다. 소방관들이 이런 정 씨를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을 발견한 경찰관들은 옷차림을 수상히 여기고 정 씨를 붙잡았다.



▽소외계층을 겨냥한 묻지마 칼부림=희생자들 대부분은 중국동포, 일용직 노동자 등이었다. 특히 희생자 13명 중 6명이 인근 시장과 식당에서 생계를 잇던 중국동포였다.

현장에서 숨진 중국동포 이월자(50·여) 씨는 2년 전 중국에서 건너와 식당일과 파출부일을 하고 있었다. 이 씨의 형제자매들이 한국에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이 씨는 한 푼이라도 더 모으겠다며 일터 바로 옆의 고시원을 고집했다. 동생 순자 씨는 “형부 사업이 망해 언니한테 한국에 와서 일하라고 권했는데…”라며 통곡했다.

또 중국동포 김보금(45·여) 씨와 장채옥(41·여) 씨는 친척으로 같은 고시원에 머물다 변을 당해 중상을 입고 입원했다.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다 화를 당하기도 했다. 중상을 입은 김대영(29) 씨는 낮에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해왔다. 어머니 이정임(51) 씨는 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검정고시를 본다고 고시원에 들어가더니 이런 일을 당했다”며 연방 눈물을 쏟아냈다.


▲ 영상취재 : 정영준 동아닷컴 기자


▲ 영상취재 : 정영준 동아닷컴 기자

▽평소 사회 불만 많아=경남 합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2002년 서울로 온 정 씨는 주로 강남 지역 식당에서 주차요원으로 근무했다. 최근엔 일정한 직업 없이 지내다 고시원비와 휴대전화 요금, 예비군 불참 벌금 150만 원 등을 내지 못해 금전적 압박을 받아왔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정 씨가 평소에 혼자 죽을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을지를 계속 생각해 왔다”며 “정기적으로 두통이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감정기복이 더 심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정 씨와 같이 주차 일을 했던 김모 씨는 “정 씨는 별명이 종달새일 만큼 평소 남의 말에 잘 끼어들고 수다스러웠지만 사실은 소심하고 세상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며 “항상 투덜거리면서도 매일 로또에 매달렸는데 사건 전날에도 로또 용지를 들고 와 당첨 번호가 이상하다고 불평하기에 귀찮아했더니 시무룩해져서 돌아갔다”고 전했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사망자 명단

△순천향병원: 서진(20·여), 민대자(61·여), 이월자(50·여)

△용산 중앙대병원: 조영자(53·여)

△강남성모병원: 김양선(나이 미확인·여), 박정숙(52·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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