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PD수첩 잘못 인정할땐 악영향…최대한 시간 끌자”

  • 입력 2008년 7월 10일 03시 00분


‘상황실’ 설치… 지난달 말부터 수차례 대책회의

MBC가 ‘의도적 왜곡 및 오역’ 논란을 일으킨 ‘PD수첩-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와 관련해 지난달 하순부터 여러 차례 대책회의를 열고 “섣부른 잘못 인정이나 사과는 법원 재판, 검찰 수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최대한 시간을 벌면서 지켜보자”는 대책을 세운 것으로 밝혀졌다.

본보가 9일 입수한 ‘PD수첩 상황실 회의’ 문건에 따르면 MBC는 최근 ‘PD수첩 상황실’을 설치하고 PD수첩의 조능희 책임 PD를 비롯해 기획 홍보 등 각 분야 팀장급 10여 명이 참여해 지난달 27일 첫 회의를 열었다.

이틀 뒤 열린 2차 회의에는 PD수첩 변론을 맡은 법무법인 덕수의 김형태 변호사가 참석했으며 회의 결과는 경영진에게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PD수첩은 법원 재판(농림수산식품부가 제기한 정정 및 반론보도 신청), 검찰 수사(농림부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 공정성에 대한 방통심의위의 심의를 받고 있다. 방통심의위는 9일 ‘PD수첩’ 제작진의 의견 진술 절차를 연기해달라는 MBC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16일 오후로 연기했다.

▽‘잘못 인정 말고 시간 끌자’=6월 29일 열린 ‘PD수첩 상황실’ 2차 회의 문건에는 “대다수의 의견은 오역 등의 문제를 발표하지 말자는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어 “MBC가 번역 또는 오역의 문제점을 방송하는 순간, 이를 선의로 받아들이기보다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내용에 작은 실수가 있었다고 경영진이 인정하는 순간 국민들은 ‘MBC가 정말 잘못했구나’라며 MBC에 대한 실망과 공격이 이어질 수 있다”는 발언들이 정리돼 있다.

PD수첩에 대한 내부 심의와 관련해서도 “심의에 착수하거나 착수한다고 발표하는 것 자체가 PD수첩의 보도가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27일 1차 회의 문건의 ‘대응기조 설정’ 항목에서도 “잘못 인정이나 사과를 하지 않고 검찰 소환 불응 등으로 최대한 시간을 끄는 명분을 모색한다”는 발언이 있다.

29일 회의 문건에는 “오역의 잘못을 인정하고 털고 가는 게 필요하다는 소수 의견도 제시됐다”면서 “끝까지 가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으나 민영화와의 상관관계도 고려해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검찰 수사에 대한 대책 수립=6월 30일 3차 회의 문건은 “검찰이 PD수첩을 명예훼손으로 걸기는 어렵다는 것이 다수 의견이며 신문에 나타난 수사방향 등을 분석해 검찰로서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문답을 만들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방송 내용 중 미국 쇠고기 리콜이 2등급이었다는 점을 왜 삭제했는지, 아레사 빈슨의 사인 중 감염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 삭제 시 어떤 전문가의 의견을 구했는지 등에 대해 치밀한 대답을 준비하는 게 필요하다는 제안도 정리돼 있다. 보조작가, 작가, 미국 현지 코디네이터 등 다른 스태프의 소환 조사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하며 검찰의 1차 소환은 불응하기로 한다는 방안도 있다.

7월 1일 회의 문건에는 “검찰의 방송 원본 테이프 제출 요구를 전면 거부해 압수 수색 영장이 집행되면 노조가 반발하고 촛불시위가 예상된다”는 점도 요약해 두고 있다.

이 같은 문건이 알려지자 PD수첩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870분짜리 원영상 등 필요한 자료를 제출하도록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설득이 되지 않을 경우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해 MBC를 압박하거나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자료를 가져오는 방법 등을 고려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 심의와 법원 공판에 대한 대응=6월 30일 3차 회의 문건에는 “방통심의위의 심의와 관련해 회사의 직접 대응보다 PD연합회나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외부단체가 나서는 것이 낫다”는 발언이 있다. 특히 7월 1일 방통심의위 심의 때 사람들이 모여 피케팅을 하면 심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오후) 1시부터 미디어행동 PD연합회가 주축이 돼 기자회견 및 피케팅을 할 예정이라고 적시했다. 문건은 심의 결과가 ‘주의’ 조치로 나올 때에는 노조나 협회의 유감 표명으로 대응하고, ‘경고’ 이상이 나오면 재심 신청 및 행정소송으로 대응한다는 방안도 내놨다.

법원 재판과 관련해 6월 30일 1차 심리는 선방한 편으로, 협상단 대표였던 민동석 차관보를 증인으로 신청하는 강공을 펼쳤다고 기록했다. 이 문건은 15일 공판이 열린 뒤 22일 선고를 내릴 가능성이 높으며 최소 반론보도문 이상은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MBC “의사 결정이 아니라 정보를 공유하는 회의”=‘PD수첩 상황실’에 참석한 관계자는 “정보를 공유하는 회의인데다 회의가 열린 시점은 검찰 수사나 심의 일정도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여서 우리가 먼저 대응하기 힘들다는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PD수첩 상황실’ 회의 문건이 알려지면서 “MBC가 잘못은 알고 있으나 시간을 끌어 버틴다는 인상을 준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지금까지 MBC 대응이 대책회의 문건대로 이뤄지는 부분이 있어 ‘PD수첩 상황실’이 모종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한 중견 PD는 “회의 문건이 외부로 알려진 뒤 내부가 뒤숭숭하다”며 “경영진이 중심을 잡고 가야 하는데 PD수첩 등의 의견만 듣고 가다가 사태 진화의 기회를 놓친 것 같다는 말도 나온다”고 말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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