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논술의 길 찾기]홀로코스트

  • 입력 2008년 3월 24일 03시 00분


홀로코스트 평범한 독일인도 학살에 가담… 왜, 어떻게?

《‘누구에게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물을 것인가?’에 대하여 지금까지 역사가들은 “히틀러와 그의 나치 친위대(SS, Schutzstaffel)에게”라고 대답해 왔다. 그런데 1996년 미국 하버드대 교수 골드하겐은 ‘히틀러의 자발적 학살 집행자들 (Hitler’s Willing Executioners:Ordinary Germans and the Holocaust)’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주장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유대인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학살은 ‘독일의 국가적인 과업’으로서, 독일인 전체의 암묵적인 승인과 열성적인 참여를 통해 발생했다”고 주장해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홀로코스트(Holocaust)란 본래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에게 바치는 유대인의 의식에서 비롯한 말이다. 그러나 고유명사로는 쓰일 때는 제 2차 세계 대전 중 나치가 자행한 대규모의 유대인 학살을 가리킨다. 당시 대략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가 홀로코스트를 유발했는가에 관해 가장 널리 통용되어온 견해는 나치의 핵심 세력, 특히 히틀러의 반유태주의를 주범으로 지목한다. 이러한 시간은,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극단적인 인종주의가 홀로코스트라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본다. 이는 2차 대전 후 1945년 10월부터 독일에서 과거청산을 위해 나치 전범들을 단죄한 뉘른베르크 재판에도 반영되었다. 하지만 학살의 주범인 히틀러는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진 5월에 이미 자살했고, 친위대 대장이었던 헤르만 괴링도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사형 집행 직전에 자살하고 만다.

두 차례에 걸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당 핵심 간부들이 유죄 선고를 받음으로써 이제 나머지 평범한 독일인들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나치 체제의 희생자들로서 ‘공범 의식’과 ‘죄책감’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국가의 구성원으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골드하겐의 책은 이러한 견해에 상당한 도전을 감행한다.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소수 나치당 고위 책임자들이 직접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실어 나르고, 가스실로 안내하고, 시체를 소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유대인의 시체가 즐비한 가운데 나들이 온 듯 보이는 독일인 가족의 사진과, 독일인들이 유대인의 수염(유대인은 수염을 기르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을 잡아당기는 사진을 제시하면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먼저, 골드하겐은 “학살 집행자들이 아주 평범한 독일인들이다”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그 증거로 1942∼1943년 독일의 폴란드 점령 지역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에 참여한 101 경찰예비연대에 관한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약 500명의 남성으로 구성된 이 경찰예비연대원들은 1942년 7월부터 1943년 11월까지 3만8000명을 학살하고, 4만5000명을 가스실로 이송했다는 것이다. 사법 심문서에 따르면, 이들은 나이가 너무 많아 최전선에서 싸울 수 없었던 독일인으로서 39세 이상의 평범한 중년 가장이었다. 그들은 외압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명령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고, 히틀러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만 수행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굴종적인 관료와 같이 행동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의 ‘유대인 멸종 계획’은 매우 세분되어 있어서,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행동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그가 이끌어낸 결론은 홀로코스트가 현대 국가가 낳을 수 있는 ‘예외적이지만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평범한 중년 가장들이 유대인 대량 학살을 집행했다는 사실은 악(惡)이라는 것이 대단히 일상화되어버린 현대 문명의 잔인한 일면을 극단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이다. 현대 문명이 기반하고 있는 기술 발달은 최고의 효율성을 위해 극단적인 노동 분화를 초래하는데, 이로 인해 평범한 이들은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악(惡)을 인식하지 못한 채 거기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악의 일상화’, ‘악의 평범화’ 같은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골드하겐은 학살자가 ‘평범한’ 독일인이라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자발적인’ 학살자였다는 점을 역설하여 더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극단적인 반(反)유대주의에 물들어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반유대주의는 19세기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골드하겐이 보기에, 루터파 개신교도인 독일인들은 ‘예수를 로마인들에게 팔아버린 비열한 민족, 유대인’이라는 ‘집단적인 무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골드하겐의 주장은 즉각적으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골드하겐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만일 평범한 독일인들이 반유대주의자이며 이들이 홀로코스트의 원인이었다면 왜 독일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팽배했던 반유대주의가 유독 독일에서만 대량 학살로 나타났는가라고 묻는다. 이들은 단호하게 나치당이 집권하지 않았다면 반유대주의가 홀로코스트라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또한 평범한 독일인들이 지녔던 반유대주의가 2차 대전 뒤 어느 날 갑자기 증발되듯이 약화되어 버린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도 제기했다. 그들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인이 반유대주의에 물든 악한 존재였다면 오늘날의 독일인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어떻게 반인간적인 악한 존재가 갑자기 선량한 시민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답변하라고 주장한다.

골드하겐의 견해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나치의 학살이 반유대주의보다 인종정책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반유대주의만을 문제 삼는다면 당시 나치가 50만 명에 가까운 정신병자, 동성애자, 집시 등을 학살한 것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치의 학살은 그들이 추구했던 우성 인종만으로 구성된 ‘인종국가’ 건설을 위해 유대인을 비롯한 정신병자, 동성애자, 집시 같은 열성 인종들은 모두 불임으로 만들거나 사형시켜야 한다는 나치의 인종 정책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이처럼 골드하겐이 불러일으킨 논쟁은 미국과 독일에서 커다란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골드하겐의 주장에 대해 언론은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보수파 언론은 골드하겐을 ‘독일인에 대한 사형 집행자’라고 표현하거나, 골드하겐 같은 선동자 때문에 독일인은 시지프의 운명과 과거에 계속 짓눌려 헤어날 수 없는 불행한 독일인이 되고 있다고 비통해했다. 진보적 언론도 골드하겐의 주장이 학살을 계획하고 지휘했던 나치 고위 간부들과 평범한 독일인들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전범 처벌에 대한 명분을 흐리게 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나치 전범들이 “그때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었다”라며 면죄부를 받으려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격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골드하겐의 주장이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문제 제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종의 계몽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거대한 현대 문명 시스템 속에서 비판적으로 사회를 바라볼 기회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때로는 독재자의 대량 학살극에서 능동적인 조연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소름끼치는 역사적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박승렬 LC교육연구소 소장

<심화학습>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이 발생한 이유를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해 보고, 자신의 견해를 정하여 토론해 보자.

쿠데타 아닌 선거… 히틀러집권의 아이러니

“독일의 고통은 적국과 더러운 유태인 탓”

국민 환심 사 급부상… 의석99.7% 휩쓸어

많은 사람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쿠데타’와 같은 비정상적 방법으로 집권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히틀러의 나치당은 당시 가장 선진적인 법률을 가지고 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제도를 통해서, 합법적으로 그리고 최고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집권했다. 히틀러가 아직 젊었던 1923년에 ‘맥주홀 폭동’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대표였던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나치당의 정식 명칭)은 선거에서 1933년 3월에는 44.5%, 11월에는 무려 99.7%의 의석을 차지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한껏 발휘하여 당시 천문학적인 인플레와 살인적인 실업률로 고통 받고 있던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 모든 경제 위기의 책임을 주로 승전국들과 유대인에게 돌렸다.

즉 탐욕스러운 승전국들이 패전국 독일에 감당할 수 없는 과중한 배상금을 부과한 것이 문제이고, 게다가 국내의 부패한 부자와 ‘더러운 혈통’인 유대인 상인 및 기업가들의 행태가 더해져 독일이 고통받고 있다고 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당시 성장하던 공산주의 운동을 지목했다.

당시 나치당 외에는 제도권 내의 그 어떤 정당도 절망에 빠진 대중에게 확실한 대안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지 못했다. 경제 위기가 깊어지면서 사회민주당(SPD)과 공산당(KPD)의 지지율도 상당히 높아졌지만 이 두 당은 나치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협력하기보다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경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집권한 히틀러는 그의 통치기간 내내 독일 국민을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동원할 수 있었다. 물론 나치에 철저하게 저항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히틀러의 인민국가’의 저자 괴츠 알리는 히틀러 정권이 당시 보통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여러 가지 복지정책을 폈으며 대다수 일반 국민은 히틀러를 국민의 뜻을 아우르는 정치 지도자로 여기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했다.

그에 따르면, 히틀러 정권은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은 재물과 침략 전쟁에서 노획한 물자들을 당시 독일 국민의 복지에 사용함으로써 대다수의 지지와 묵인을 얻어내는 인기영합적인 정책을 취했다. 또한 공개되지 않았던 나치 정권의 재정부와 세무서의 자료를 살펴보면 전쟁 기간에도 일반 대중의 세금 부담은 크게 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히틀러가 실시한 여러 사회복지 정책은 독재 정권에 대한 회유책이었고, 이에 소요된 막대한 재원은 유럽 각지의 점령지에서 약탈한 재물로 충당했다는 것이다.

조은정 LC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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