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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2월 12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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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가림막 설치에 “이런다고 잘못 가려지나” 질타
서울소방본부장 “부족함 없다” 발언에 누리꾼들 “가만히나 있지” 분통
■ 시민들 어처구니없는 참사에 망연자실
《화마가 휩쓸고 간 11일 숭례문의 2층 누각은 형체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누각을 받치고 있던 석축에는 새카맣게 그을려 무너져 내린 서까래가 어지럽게 얹혀 있었다. 양쪽이 엿가락 휘듯 아래로 내려앉은 1층 누각 역시 수십 t 물대포의 충격을 견디지 못해 흙으로 된 속살을 드러냈다. 숭례문의 참담한 모습에 설 연휴 뒤 첫 출근길에 오른 시민들은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일부 시민은 숭례문 뒤쪽 입구 근처에 흰 국화 다발을 놓고 빠른 복원을 기원했다.》
이날 현장에는 오전 일찍부터 무너져 버린 숭례문을 직접 확인하려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시민들은 도로 쪽으로 떨어져 깨진 채 방치된 기와 주변에 모여 안타까운 심정에 발을 동동 굴렸다.
오전 9시경부터 구청 측이 숭례문 주변에 6m 높이의 임시 가림막을 설치하자 시민들은 “이깟 가림막으로 잘못을 가릴 수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오후 6시 40분경에 서울시 관계자들이 ‘복원 작업을 위한 사전 공간 확보’를 이유로 숭례문 주변에 펜스를 두르는 작업을 시도하자 시민들은 삼각뿔 등을 발로 차며 “방화범은 못 막고 시민을 막으려 한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화재 발생 직후부터 이날 새벽까지 현장을 지키다 걱정이 돼 아침 일찍 다시 찾았다는 손선표(75) 씨는 “선조와 후손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보충수업 후 친구들과 함께 현장에 온 양근영(17·신광여고 2년) 양은 “잔불이 잡혔다는 방송 보도를 보고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숭례문 지붕이 날아가 큰 충격을 받았다”며 “국보 1호라고 하지만 일반 시민의 무관심이 관리 부실로 이어진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일본인 여행객 기무라(23·여) 씨는 화재 직전 카메라로 담은 남대문 사진을 보여주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 고령의 시민은 침통한 표정으로 “후손들 볼 면목이 없다”며 ‘국보 1호’라는 표시와 함께 숭례문의 역사가 쓰여 있는 표지판 앞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기도 했다.
남대문시장 입구에서 10년 넘게 복권방을 운영해 온 양동호(49) 씨는 “가게에 나와 보니 숭례문 지붕이 폭삭 내려앉아 있었다”며 “일본인들이 남대문 앞에서 웃으며 사진 찍는 모습을 보는 게 낙이었는데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새벽까지 집에서 TV로 지켜보다가 이날 오후 경기 파주시에서 사고 현장으로 온 주부 박미숙(46·여) 씨는 “국보 1호를 관리하는 공익근무 요원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이번 화재는 국민소득 2만 달러라는 우리나라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린 것과 같다”고 말했다.
한편 소방방재청과 문화재청 등 관계 당국의 책임 미루기를 비판하며 10일부터 들끓던 인터넷 여론은 11일 정정기 서울소방재난본부장의 국회 발언이 알려지자 폭발했다.
정 본부장은 국회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공조체제 소방장비 등도 문제없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누리꾼들은 “소방차 수십 대를 동원하고도 국보를 다 태워먹은 마당에 무슨 할 말이 더 있나.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밉지나 않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은 이날 오후부터 접속량 초과로 서버가 다운됐다.
누리꾼들은 문화재청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대응을 지적하며 유홍준 문화재청장 등 관계자들의 문책을 촉구했다.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