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페터 한트케 ‘소망 없는 불행’

  • 입력 2007년 9월 17일 03시 01분


여기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그냥 단순한 ‘주부’가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물론 한 가정의 주부로서의 역할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겹도록 반복되는 하루하루 속에서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 특별한 경험이 자신을 보통 사람과 다르게 만들어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판에 박은 듯한 삶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특별한 삶을 원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을 흔들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평범함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의 상처와 ‘가난’이라는 삶의 굴레는 그녀에게 ‘조금은 다른 삶’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소망은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박한 소망마저 모두 사라졌을 때 그녀는 ‘소망 없는 불행’에 빠진 자신의 비참한 얼굴과 마주합니다. 더는 ‘소망을 갖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고통스러운 사실과 마주한 그녀의 몸과 마음은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두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주변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신체의 모든 균형을 잃어버려서 모서리에 부딪히고 계단에서 미끄러지기 일쑤였습니다. 심지어 웃는 것마저 힘들어서 이따금 얼굴을 찌푸릴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만 말했고 어떤 때는 너무 아파서 투덜댈 수조차 없었습니다. 더는 ‘주부’ 노릇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고통만을 느낄 수 있자 그녀는 “난 이제 인간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녀와 멀리 떨어져 살던 그는 가끔 몸이 아픈 그녀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탑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그녀를 위해 그는 딱히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눈에 비치는 대상’일 따름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서 별다른 애정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도, 그는 그저 무심하게 있다가 함께 있을 시간이 다 지나면 다시 자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그녀가 징그럽고 비참하다고 느낀 나머지 감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서 하릴없이 누워 있는 동물원의 동물들에게서나 느껴지는 진한 고독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녀는 모든 뼈의 관절이 어긋나서 산산조각 나 있었고, 염증이 난 몸에 오장육부까지 뒤죽박죽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경악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그만 방에서 나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떠난 뒤, 그녀는 서둘러 ‘작별’을 위한 몇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혹시라도 ‘이성(理性)’마저 잃을까 두려웠던 그녀는 마치 편지지 속으로 뚫고 들어갈 듯이 절실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외로움이 뼛속까지 사무쳐도 난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단다”, “난 내 자신과 얘길 한다. 그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지”, “난 정말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란단다” 그녀가 쓴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구절은 “드디어 평화롭게 잠들게 되어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다”였습니다.

편지를 다 쓴 그녀는, 침실로 가서 100알정도 되는 수면제를 몽땅 입 안에 털어 넣고, 그것만으로 모자라서 신경안정제까지 모두 먹어치웠습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웠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자살 소식을 들은 그는 ‘보람’을 느껴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그거였어, 그거였다니까. 아주 좋아, 아주 좋다니까’라고 되뇝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그는 어떤 인간으로 보입니까?

그녀는 그의 어머니이고, 그는 그녀의 아들입니다.

‘소망 없는 불행’은 작가 페터 한트케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입니다. 실제로 페터 한트케의 어머니는 그가 미국으로 강연 여행을 떠났던 1971년 말에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때의 충격과 고통 슬픔이 빚어낸 소설 ‘소망 없는 불행’ 속에 진하게 배어 있는 ‘한 인간의 단단한 슬픔’을 느껴보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고통스러운 순간에 ‘아주 좋아’라고 되뇌는, 그래서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한 인간의 ‘굳고 단단한’ 눈물을 직접 닦아주지 않겠습니까?

황성규 학림 필로소피 논술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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