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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9월 17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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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어린아이들은 윌슨 대통령의 사진에 인사를 했다. 신사들도 윌슨의 사진 앞을 지날 때면 모자를 벗어 존경을 보였다. 집집마다 윌슨의 사진을 걸어놓고 친근한 눈길로 바라보기까지 했다.
도산 안창호가 소개하는 미국의 모습이다. 민족 지도자가 아쉬웠던 그에게, 윌슨은 ‘모범사례’로 다가왔나 보다. 일단 지도자를 뽑으면, 모두가 하나 되어 그를 따르고 존중하라는 것이 도산의 뜻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윌슨의 사례에서 도산과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집집마다 지도자의 얼굴을 걸어놓고, 그의 사진에 예의를 차리는 광경은 지금도 볼 수 있다. 휴전선 북쪽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이 아니던가.
윌슨의 예를 들면서도, 도산은 분명한 선을 긋는다. ‘전쟁 중에 지도자한테만’ 그래야 한다는 거다. 민주사회에서 지도자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당연하다. 다만, 적이 앞에 있을 때만큼은 비판을 참아야 한다.
독재자들은 대개 전쟁과 함께 온다. 그네들의 권력은 나라의 적이 분명할 때 더 강해지는 까닭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는 전쟁을 일으켰고, 끊임없이 전선(前線)을 늘려갔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아직도 미국과 ‘전쟁 중’이다. 사담 후세인 또한 이란과 미국 등, 싸울 만한 적들을 늘 국민 앞에 내세웠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한반도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휴전’하고 있을 뿐이다. 북측 최고 지도자는 ‘장군님’으로 통하고, 공식적인 명칭 또한 ‘국방위원장’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한반도 평화협정을 제안한단다. 냉전이 사라진 세상에서 남북이 총칼을 맞대야 하는 이유는 오래전에 없어졌다. 평화협정 제안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하지만 북한의 권력자들에게 평화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갈 터다. 북한의 조선노동당은 항일 빨치산 ‘투쟁’으로 조국을 되찾았고, 미제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80년대 말 고난의 ‘행군’을 이겨냈다는 데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찾는다. ‘미제’가 조국을 위협하는 한, 자신들이 권력을 잡아야 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그런데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게 되면 어떨까?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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