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평촌고 문미향 교사의 ‘서로를 발견하는 수업’

  • 입력 2007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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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수업의 출발점은 학생들로 하여금 ‘나 스스로를 열도록’ 만드는 데 있다는 문미향 교사. 강병기 기자
논술수업의 출발점은 학생들로 하여금 ‘나 스스로를 열도록’ 만드는 데 있다는 문미향 교사. 강병기 기자
“○○의 세계관은 변덕을 내포한 자기중심적 세계관이다. 무위자연사상도 아니고 결국에는 본능에 충실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평소 말이 없는 ○○가 나처럼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을 하면서 살 줄 알았는데, 조금 충격적이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정립된 세계관은 필요하지 않을까?”(M 군에 대한 L 군의 소개서)

“집이 고깃집을 하다 보니 생일 파티를 해도 고기를 먹게 되는데 그게 장사를 방해하는 일인 것 같아 불효라고 생각되기도 해서 항상 생일 파티하기가 꺼려졌다고 그는 솔직히 말했다.”(P 군에 대한 L 양의 소개서)

경기 평촌고 3학년 학생들은 지난해 4월 친구를 소개하는 이런 소개서를 써서 국어생활 과목 수행평가 점수를 받았다. 국어 담당 문미향 교사가 ‘제비뽑기를 통해 뽑은 같은 반 친구를 학교 밖에서 세 번 만나 서로를 탐색한 뒤 상대방을 소개하는 밀도 높은 소개서를 작성하라’는 과제를 내준 것이다.

진정한 논술 교육은 학생들이 자신의 마음을 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게 문 교사의 신념이다. 결국 글을 읽는다는 건 ‘남을 아는 방식’이요, 글을 쓴다는 건 ‘나를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감성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든 논술이든 잘 볼 수 있기를 바라느냐”고 되묻는 문 교사. 그녀는 교과서뿐 아니라 영화 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장르의 텍스트들을 가져와 수업에 활용한 뒤 시험 문제로도 낸다.

다음은 지난해 3학년 1학기 국어생활 과목 기말고사에서 문 교사가 출제한 내용. ‘영화읽기’의 개념을 설명한 지문과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줄거리를 제시한 뒤 “‘영화읽기’를 이 영화에 적용한 것 중 잘못된 것을 찾아라”는 객관식 문제를 냈다. 선택지 5개는 이랬다.

①주인공 두 노장 배우의 촌철살인 같은 절제된 대사와 표정변화 없는 연기 속에서 영화의 묘미가 한층 더해지는 것 같아.

②‘안락사’라는 중심주제 외에도 미국사회에 존재하는 ‘극단적 물질주의’를 매기와 그의 기형적인 가족관계를 통해 고발하고 있어.

③트레이너인 ‘프랭키’가 “‘모쿠슈라’는 내 사랑 내 핏줄이란 뜻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영화의 제목과 관련해 독자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것 같아.

④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액션 스타 출신이래. 스크린 속에서 폭력으로 세상을 평정했던 그가 이제 폭력만으로는 인생을 바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눈으로 영화를 만든 것 같아.

⑤이 영화의 음악은 감독이 직접 작곡한 것이라 더 의미가 깊어. 영화와는 별개로 배경음악의 기술적 원리를 전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어.

문 교사는 중간·기말 시험문제 중 상당수를 ‘주관식 같은 객관식’으로 출제한다. 비록 객관식이지만 학생들이 생각하지 않으면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를 내기 위해서다.

“요즘 수능 지문도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힘’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반드시 요구되죠. 독해력과 사고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선 수능과 논술이 크게 다를 바 없어요.”

정규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4, 5명씩 모둠을 이뤄 토론하는 수업방식을 도입한 것도 같은 맥락. 교사가 고민의 방향을 학생에게 미리 알려주거나 제한하는 수업방식을 지양하고, 학생과 교사가 능동적으로 의사를 주고받는 토론식 수업으로 진행한다. 그러다 보니 당초 계획했던 수업방향이 ‘스스로 진화’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당초 성폭행(추행)범에게 어떤 처벌을 내리는 것이 합당한가를 두고 수업시간에 토론하려고 했지만 아이들은 그것에 대해 토론하거나 글쓰기를 원치 않았어요. 오히려 ‘언제쯤 성행위를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어 했죠. 계획을 완전히 바꾸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은 너무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어요. 결국 학생들은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갖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죠. 학생들은 여학생에 의한 남학생 성추행이 학교 현실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례를 들어 지적해주기까지 했습니다.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발견하는 수업이었어요.”

결국 이런 토론식 수업을 제대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같은 과목 교사들이 사전에 모여 수업주제의 선택과 접근방식을 두고 토론한 뒤 도출된 합의점을 바탕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팀 티칭’이 필수적이다. 2학년 문학수업의 경우 문 교사를 비롯한 평촌고 담당 교사들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가르치기에 앞서 이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역설’ 개념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두고 ‘의식의 흐름’이 단순한 ‘감정의 변화’와 다르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해야 했다.

“학생들은 말하거나 쓰는 걸 귀찮아합니다. 하지만 수업과정에서 ‘인간은 누구나 말하고 싶어하고 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학생들은 단지 자신이 말하고 쓴 것에 대해 남들로부터 ‘옳다’ ‘그르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걸 두려워할 뿐이죠. 교사가 학생을 발견하면, 학생도 교사를 발견해 줘요. 서로의 감수성이 열리고, 서로를 발견하는 수업….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진정 글을 읽고 생각하고 쓰는 힘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문 교사는 ‘현장 체험식 논술 학습’으로 올해 수업방식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외부 예술전문가들과 교사들이 논술교육동아리를 이룸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예술작품 감상을 통해 세상에 대한 독해력과 사고력을 키우도록 하는 것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2006년 1학기 평촌고등학교 3학년 국어 중간고사 문제 중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

각하고 /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시와 정치의 사이 / 정치와 경제의 사이 / 경제와 노동의 사이 / 노동과 법의 사이 /

법과 전쟁의 사이 / 전쟁과 공장의 사이 / 공장과 농사의 사이 / 농사와 관청의 사이 /

관청과 학문의 ㉢ 사이를 /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 권력과 / 돈과 / 착취와 / 형무소와 / 폐허와 / 공해와 /농약과 / 억압과 /

통계가 남을 뿐이다.

-김광규, 생각의 사이 -

[문제] 시의 ㉢이 실제로 실현된 예로 가장 거리가 먼 것은? (3.8점)

①포스코는 제철회사라는 차가운 기업 이미지를 벗기 위해 클래식이라는 장르를 기업 CF 및 프로모션에 도입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다. 클래식 현악기의 현은 철로 만들어졌지만 소비자는 클래식을 들으면서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광고카피는 소비자에게 철의 소중함과 그렇게 소중한 철을 제련하는 포스코란 기업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창출하였고, 결국 포스코의 대외인지도는 크게 향상되었다.

②조세희의 첫 번째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70년대 한국 사회가 부딪치고 있는 근대화에 따른 제반 문제를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사실이나 지식만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일깨우고 독자의 정신을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30년 전, 조세희는 서울의 한 철거촌을 찾아가 고기를 굽고 국을 끓여 세입자 가정의 마지막 식사를 준비했다. 허물어질 집을 걱정하며 가장은 밥을 잘 넘기지 못했다. 마지막 식사 자리를 지켜주기에 벽은 너무 얇았다. 뚫려버린 담벼락 밑에서 조세희는 철거반원들에 맞서 주민들 속에 섞였다. 그날, 난쟁이는 잉태됐다.

③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나라인 부탄의 수도 팀부에서 FIFA 랭킹 202위 부탄과 203위로 최하위를 기록한 몬세라트가 당당하게 A 매치 경기를 가졌다. 국제 경기를 치른 경험이 단 한 번밖에 없었던 부탄에서는 이날 수용할 수 있는 관중의 두 배가 넘는 2만5000명이 관전해 뜨거운 열기를 보였다. 경기 결과는 부탄의 4-0 승. 하지만, 경기 결과를 떠나서 두 나라는 축구를 통해 우정을 쌓고 자신감을 가졌다는 큰 선물을 안고 아름다운 꼴찌 결승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④ 평화를 위한 글쓰기 (Writing for Peace)를 주제로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현기영 문예진흥원장은 갈수록 정치와 문학의 분리가 가속화하는 시대에 전쟁과 평화, 공동체의 지속과 같은 진지한 주제를 놓고 전 세계의 문인들이 모여 토론한다는 데에 이번 행사의 의의가 있다면서 우리가 쓴 글이 그 격렬한 고발성 때문에 비문학 또는 반문학이라는 비난을 받을지라도 자유와 평화를 위해 증오할 것은 증오하고 고발할 것은 고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⑤양구에 수녀님들이 할머니들을 위해 봉사하는 안나의 집이란 곳이 있다. 거기엔 천사 같은 여인들만 산다. 그런데 그곳에 한 달에 두세 번쯤 어린 남자들이 천사를 만나러 간다. 그 어린 남자들이란 바로 내가 중대장으로 있는 군부대의 군인들이다. 우리는 봉사하러 가는 것이 아니고 놀러간다. 안나의 집은 우리 헌병대 검문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우리는 그곳에 가서 주로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같이 말벗도 해 드리고 할머니들과 같이 놀기도 한다. 할머니들은 우리가 노래 부르는 걸 제일 좋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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