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2007 정시 논술 특집/대학별 논술문제 유형

  • 입력 2006년 11월 28일 03시 02분


《이제는 논술이다. 대입 정시모집에서 논술은 대학수학능력시험, 내신 성적과 함께 3대 전형요소의 하나다. 수능과 내신 성적이 이미 결정된 시점에서 수험생들은 논술 실력 향상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시모집 논술은 대학별로 유형이 조금씩 다르다. 지원하려는 대학의 논술 유형을 파악해 맞춤식 연습을 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대학별 유형에 맞춘 연습문제를 싣는다.》

■서울대학교 논술문제 유형

[문제] 두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추론되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제시한 후,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문을 참고하여 논술하시오.(2500자 내외)

(사례 A) 인터넷이 개인의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미국 ○○대학 연구소의 보고서는 인터넷이 보편화됨에 따라 개인은 가족 및 친구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 대중 매체로부터도 멀어져 결과적으로 ‘비사회적 인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조사 대상이 된 미국 성인 남녀 4113명 중 절반 이상이 1주일에 5시간 이상을 온라인에 할애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13%는 가족 및 친구와 보내는 시간을 줄였고, 26%는 전화 통화 시간도 단축하였다. 59%는 텔레비전을 덜 보고, 25%는 집에서까지 업무를 본다고 답하였다.

연구를 주관한 연구소장은 “인터넷에 매달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개인이 ‘실제적인 인간 관계’를 가지는 시간은 줄어든다”라고 말한다. 1950년대 텔레비전 등 대중 매체가 쏟아져 나올 당시 ‘고독한 군중’이 출현했던 것처럼 인터넷의 등장으로 또 다른 종류의 소외된 인간형이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사례 B) “내성적이고 컴퓨터 게임을 무척 좋아했다.” 20일 육군 합동조사단에 따르면 K 일병은 소심한 성격으로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육군 합조단 관계자는 “조사에서 K 일병은 입대 전 몸이 허약해 전문대를 중퇴했는데 그때도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며 “이런 점에 비춰 K 일병이 작은 질책에도 큰 상처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런 성격 때문에 K 일병은 휴가나 외박을 나가서도 주로 컴퓨터 게임에 몰두했고 최전방 감시 소초(GP)에 투입돼서도 초등 및 중학교 동창인 C 일병에게만 몇 차례 불만을 표출했을 뿐 다른 동료들과는 의사소통이 단절된 상태였다.

K 일병은 오래전부터 인터넷에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프로다’라는 제목으로 미니홈페이지를 개설해 운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려움을 극복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사건 직전 ‘인생은 苦苦苦’, ‘슬픔’이란 제목의 짧은 글들을 남겨 군 생활의 고민을 암시하기도 했다.

[동아일보(2005년 6월 21일)]

【제시문 1】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데에는 두 가지 관계가 있다. 이 두 가지 관계는 인간의 삶의 뿌리(근원)가 된다는 점에서 근원어라 일컬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나’가 가질 수 기본적인 관계가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나’와 ‘너’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그것’의 관계이다. ‘나-너’와 ‘나-그것’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두 개의 근원어는 세계에 대한 관점이자 세계와 호흡하는 방식을 나타낸다. ‘나-너’는 내가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야만 세워지는 관계이고, ‘나-그것’은 나의 온 존재를 기울이지 않은 상태에서 성립하는 관계이다. 다시 말하면 ‘나-너’의 관계는 인간의 주체적인 체험이자 인격적인 만남, 주체 대 주체의 만남으로 이루어지고, ‘나-그것’의 관계는 객체적인 경험이자 지식적인 만남, 주체 대 객체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는 차등적 관계에 있는 반면, ‘나’와 ‘너’와의 관계는 동격의 두 독특한 존재들의 대등한 관계이다. 그때의 ‘나’는 진정한 나다. ‘나’의 그 두 가지 존재 방식 가운데 진정 전체적인 인격체로서의 충만한 ‘나’는, ‘너’와의 관계를 가질 때의 ‘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과 관계를 맺을 때, 즉 재산, 집, 그 사람, 국가 등 3인칭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과 관계를 맺는 주체는 ‘나’의 일부일 뿐이요 나는 전체는 아니다. 이것은 재산이라는 ‘그것’과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비인격적인 관계를 맺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단순히 하나의 기능인으로서 다른 사람과 어떤 일을 처리했을 때, 그때의 나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과 대체될 수 있으며 그 사람은 비록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너’가 될 수 없고 오히려 하나의 ‘그것’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나-너’는 ‘나’와 ‘너’가 합해진 것이 아니다. ‘나-너’는 ‘나’보다 진일보한 개념이다. 그러나 ‘나-그것’은 ‘나’와 ‘그것’이 합해져서 생긴 것이다. 이것은 ‘나’보다 처진 개념이다. ‘나-그것’의 ‘나’는 타자를 공간적, 시간적, 인과적 연관 속에 두는 것으로, ‘그것’은 자기의 위치와 시각에 따라 제약이 있다. ‘나-너’의 ‘너’도 물론 공간 속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그 공간은 다른 타자들과 비교하는 공간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상대와 마주 서 있는 상대자와의 공간이다.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제시문 2】

산업 사회는 산업의 발전이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여 이루어짐에 따라 우리에게 무한한 생산과 무한한 소비의 길을 가져다주었으며, 기술이 우리를 전능하게 하고 과학이 우리를 전지의 존재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욕망의 끝없는 충족은 안녕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행복의 길로 이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최대의 쾌락으로 가는 길조차도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사상, 감정, 취미가 정부와 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대중 매체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 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꿈은 끝나 버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재산을 획득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생존의 존재 양식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 양식을 가장 당연한 생존 양식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활양식으로 알고 있다. (중략)

생존의 존재 양식을 지향하는 사회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경제와 정치를 인간의 발전에 종속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잃을 지경의 빈곤 속에 사는 상황에 처해서는 안 된다. 또한 끊임없는 생산 증대와 아울러 소비 증대를 요구하는 자본주의적 경제 법칙에 떠밀려서 한낱 소비인으로 전락한 실존을 영위해서도 안 된다. 즉 소유 양식처럼 물건의 대상으로 살거나 사물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을 버리고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생존 양식을 지녀야 한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제시문 3】

시장이, 그리고 지금은 가상공간이 공유되는 문화를 문화 공연과 문화 상품의 형태로 식민지화하려는 추세를 가속화하면서, 전통적인 인간관계를 표현하고 기존의 공동체를 육성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인간의 활동을 네트워크로 조직하고 가상공간의 가상 세계 안에서 사람들을 활발히 어울리게 하면 경제적으로나 지적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 활동의 대부분이 상업 영역으로 옮겨짐에 따라 잃는 것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현실화할 경우 접속은 그저 상업 영역 안에 끼어든 행위로 협소하게 정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탈근대가 그토록 찬미하는 자기실현이라는 목표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

다양한 모습을 갖춘 네트워크로 사람들이 연결되면 실시간에서 일어나고 얼굴과 얼굴을 맞댄 대면 접촉의 사회관계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든다. 전자 통신이 매개하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21세기에는 같은 공동체 안에서 같은 인간들끼리 직접 살을 맞대고 어울릴 수 있는 기회들을 모든 나라에서 만들어야 한다. 이런 노력을 간과한다면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은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도 시간문제이다. (중략) 글로벌 네트워크, 전자 상거래, 문화 생산이 새로운 정치 세력의 한 축을 맡는다면, 심도 있는 사회적 교류의 재구축, 사회적 신뢰와 자본의 재창출, 강한 지역 공동체의 회복은 정치 세력의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한다. 아주 손쉽게 맺을 수 있는 관계, 가상현실, 상품화된 체험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반기를 드는 후자는 문화의 중요성을, 지리의 중요성을 피력한다. 접속의 시대는 ‘우리가 타인과 맺는 인간관계를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제러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제시문 4】

여우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녕”

여우가 말했다.

“안녕”

어린 왕자는 공손히 대답하고 몸을 돌렸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 여기 사과나무 밑에 있어.”

좀 전의 그 목소리가 말했다.

“너는 누구지? 넌 참 예쁘구나.”

어린 왕자가 말했다.

“난 여우야.”

여우가 말했다.

“이리 와서 나와 함께 놀아. 난 정말로 슬프단다…."

어린 왕자가 제의했다.

“난 너와 함께 놀 수 없어.”

여우가 말했다.

“나는 길들여져 있지 않으니까.”

“아, 미안해.”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러나 잠깐 생각해 본 후에 그는 다시 말했다.

“‘길들인다’는 게 뭐지?"

“넌 여기 사는 애가 아니구나. 넌 무얼 찾고 있니?”

여우가 물었다.

“난 사람들을 찾고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길들인다’는 게 뭐지?"

“사람들은 소총을 가지고 있고 사냥을 하지. 그게 참 곤란한 일이야! 그들은 병아리들도 길러.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지. 너 병아리를 찾니?”

여우가 물었다.

“아니야. 난 친구들을 찾고 있어. ‘길들인다’는 게 뭐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너무 잘 잊혀지고 있는 거지. 그건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관계를 만든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 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최원종 파사쥬논술 대표강사 빨간넥타이학원 통합논술 강사

■고려대학교 논술문제 유형

※ 다음 네 개의 제시문은 하나의 공통된 주제와 관련된 글이다. 그 주제를 말하고, 제시문 간의 연관 관계를 설명하시오. 그리고 그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가) “젊은 친구”하고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문명은 인격의 고결함이나 영웅적인 것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는다네. 그런 것은 정치적 무능의 징후지. 현대처럼 적절하게 조직된 사회에서는, 고결성을 지닌다든가 영웅적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도 없다네. 그러한 기회가 발생하려면, 우선 사회의 상황이 철저하게 불안정해야 하지. 전쟁이 일어난다든가, 충성의 의무감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든가, 항거해야 할 여러 가지 유혹이 있다든가, 싸워서 쟁취하느냐 수호해야 하느냐 하는 식의 애욕의 대상이 있다든가. 그러한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이 고결한 정신과 영웅주의 같은 것이 다소 의의가 있겠지. 그러나 지금은 전쟁 같은 것은 없네. 누구든지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도록 최대의 주의를 다하고 있지. 충성의 의무감이 두 갈래로 갈라질 염려도 없네. 즉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도록 길들여져 있지. 그리고 마땅히 해야 되는 것들이란, 모두 지극히 즐거운 것이며, 자연적 본능은 대부분 자유롭게 해방되어 있네. 그러므로 항거해야 할 유혹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 그리고 만일의 경우에, 우연히도 그 어떤 불행하고 불쾌한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그때야말로 불쾌한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취하도록 소마가 준비되어 있지. 화를 진정시키는 데도 소마가, 적과 융화하는 데도 소마가, 끈기 있게 지구력을 강화시키는 데도 소마가 준비되어 있네. 옛날에는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하고 격심한 도덕적 훈련을 해야만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지. 그러나 지금은 반 그램의 소마 정제 두 개 내지는 세 개만 마셔버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네. 지금은 어떤 사람이라도 도덕가가 될 수 있지. 병 속에다 도덕성의 반만 집어넣은 채로 어디라도 갈 수 있다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기독교 정신, 즉 소마가 그것이지.”

“그러나 눈물은 필요합니다. 오델로가 말한 것을 기억하고 계시죠? ‘폭풍이 분 뒤에 언제나 이러한 고요가 찾아온다면, 죽은 자가 깜짝 놀라 깨어날 때까지 바람은 불지어다.’ 나이가 많은 인디언이 항상 나에게 들려주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사키의 소녀에 관한 이야깁니다. 그녀와 결혼할 젊은 남자는, 그녀의 뜰에서 매일 아침 풀을 베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 같았으나, 모기와 파리와 요술쟁이들이 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대부분 물리거나 찔리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견뎌 낸 한 남자가 있어서 그가 소녀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군! 그러나 문명국에선”하고 총재가 말했다. “풀 같은 걸 베어 주지 않아도 여자를 얻을 수 있다네. 그리고 물거나 찌르거나 하는 모기나 파리도 없지. 1세기 전에 전부 전멸시켜 버렸으니까.”

야만인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멸시켜 버렸다고요? 과연 당신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죠. 불유쾌한 것은 모조리, 그것들과 싸우는 것을 배우는 대신 손쉽게 쫓아 버린다는 것이죠. 어떤 쪽이 남자의 마음이겠습니까? 잔혹한 운명의 돌팔매질과 화살을 받고도 참는 것, 조수처럼 밀려드는 재앙을 두 손으로 막아 싸워서 이와 함께 쓰러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고민하는 것도 참는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당신들이 하는 것은 오로지 돌과 화살을 없애 버리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은 너무나 안이한 것이 되고 맙니다.[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나) 새로운 적은 본질적으로는 외부적인 속박이 아니라 퍼스낼러티(personality)의 자유를 충분히 실현하게 하는 일을 방해하는 내부적인 요소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자유의 궁극적인 승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러한 신앙의 자유는 사람들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서 신앙을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교회와 국가의 권력에 대한 승리긴 하지만, 근대인은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서는 증명되지 않는 사실을 믿는 내면적인 능력도 크게 상실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우리들은 언론의 자유가 자유를 위한 최후 단계라고 느낀다. 비록 언론 자유가 ‘낡은’ 속박에 대한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긴 하지만 근대인은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누구나가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또한 근대인은 독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즉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독창적인 사고방식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그의 사상의 발표에 간섭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또 우리는 인간이 그에게 무엇을 하라, 또는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는 것과 같은 외적 권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행동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우리는 여론이나 ‘상식’과 같은 익명의 권위가 가지는 역할을 경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기대에 일치하도록 깊은 주의를 하고 있는가 하면, 또한 그러한 기대에 어긋나는 것을 똑같이 심각하게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여론과 상식의 힘은 극히 강력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외부에 있는’ 권력으로부터 한층 더 자유롭게 되는 데 마음이 황홀해져 ‘내부에 있는’ 속박과 강제와 공포에 대해서는 맹목화 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의 문제는 오로지 근대사의 과정에서 보아 우리가 획득한 종류의 자유를 ‘보다 더’ 많이 획득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과, 그러한 자유를 부정하는 힘에 대해서 자유를 수호하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획득한 자유는 최대한의 힘으로 지켜야 하지만, 자유의 문제는 다만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렸다. 즉 우리는 다만 전통적인 자유를 유지하고 증대시킬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의 자아를 실현시켜 이러한 자아와 인생을 믿게 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자유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에리히 프롬, ‘자유에서의 도피’]

(다-1)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장자, ‘지락(至樂)’]

(다-2) 자유(子游)가 말했다. “땅의 퉁소소리는 여러 구멍의 소리이고 사람의 퉁소소리는 피리소리군요. 그럼 부디 하늘의 퉁소소리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자기(子기)가 대답했다. “수없는 것에 바람이 불어 서로 다른 소리를 내고 있어도 온갖 구멍이나 피리 각기 스스로가 소리를 내는 거야. 모두 각자가 제 소리를 택하고 있지만 사나운 소리를 나게 하는 게 누구일까?”[장자, ‘제물론(齊物論)’]

(라) 불가능한 계급 -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독립적이라는 것! 그것들은 동시에 가능하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노예라는 것! 이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공장 노예 제도의 노동자들이 이보다 더 좋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지금 상태처럼 기계의 나사로, 또 말하자면 인간의 발명품에 대한 보완물로 소모되는 것을 치욕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높은 급여를 통해 그들의 비참한 삶이 본질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즉 임금이 높아진다고 해서 그들이 당하고 있는 비인격적인 노예화가 지양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의 기계적인 메커니즘 내에서 비인격성의 증대를 통해 노예 상태의 치욕이 하나의 미덕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말을 곧이듣는 것은 어리석다! 아! 인격이 아니라 나사가 되는 대가로 하나의 값을 갖게 되다니! 그대들은 무엇보다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생산하고 가능한 한 부유해지려는 국민이 현재 범하고 있는 어리석음의 공모자들인가? 오히려 그대들이 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내면적인 가치가 그러한 외면적인 목표를 위해 포기되는지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그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자유롭게 호흡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면 그대들의 내적인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들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조금도 갖지 못하고 있다면? 그대들이 김빠진 술과 같은 그대들 자신에 진저리가 난다면? 그대들이 신문에 귀 기울이고 부유한 이웃을 곁눈질하고 권력, 돈, 여론의 급격한 부침에 의해 욕망에 자극을 받는다면? 그대들이 누더기를 입고 있는 철학과 무욕(無慾)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더 이상 믿지 않고, 그대들 중에서 보다 정신적인 사람들에게 정녕 잘 어울릴, 돈도 직업도 배우자도 없는 자유롭고 목가적인 삶이 그대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면? [니체, ‘아침놀’]

우효기 청솔학원 논술연구모임 ‘일이관지’ 교재팀장

■동국대학교 논술문제 유형

[문제 1] 제시문 (가)와 (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자신의 주장을 10∼12줄(250∼300자) 분량으로 논술하시오.(20점)

(가) 생활이 아무리 비참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생활을 회피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된다. 생활은 그것을 살아가는 사람만큼 나쁘지는 않은 법이다. 흠을 잡으려면 천국에서도 흠을 잡을 수가 있다. 가난하더라도 생활을 사랑하기 바란다. 빈민구제소에 들어가 있다 하더라도 즐겁고 가슴이 설레는 멋진 시간은 있을 것이다. 저녁 해는 부자의 저택의 창에서뿐만 아니라 양로원의 창에서도 똑같이 붉게 타오른다. 봄이 오면 문 앞의 눈은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빨리 녹아 버린다. 평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장소에 살고 있어도 궁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족감과 사람을 분발하게 하는 사상을 품은 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옷이든 친구든 새로운 것을 손에 넣으려고 너무 억척스럽게 굴어서는 안 된다. 의복을 팔아서 사상을 지키자. 거미처럼 하루 종일 다락방의 한구석에 처박혀 있다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사상만 잃지 않는다면 세계는 조금도 좁아지지 않을 것이다. 필요 이상의 부를 가지게 되면 필요 이상의 것들을 손에 넣게 될 뿐이다. 영혼의 필수품을 마련하는 데는 돈이 필요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나) 생계수단에 대한 끊임없는 걱정만큼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없다. 나는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오직 경멸을 보낼 뿐이다. 그들은 위선자들이든가 아니면 바보들이다. 돈은 그것이 없으면 다른 오감을 사용할 수 없는 제6감과 같다. 적당한 수입이 없으면 인생의 가능성 중 절반이 차단당한다. 유일하게 조심해야 할 일은 당신이 버는 돈을 초과하여 단 한 푼의 돈도 더 쓰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가난이 예술가에게는 가장 좋은 자극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뼈아픈 가난의 고통을 결코 실감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빈곤이 당신을 얼마나 비열하게 만드는지를 모른다. 빈곤은 당신을 끝없는 모욕에 노출시키고, 당신의 날개를 꺾고, 암처럼 당신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부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고 방해받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으며 관대 솔직하고 자립적으로 살기에 충분한 만큼의 부일뿐이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전적으로 생계를 자신의 예술에 의존해야 하는 예술가를 나는 진심으로 불쌍히 여긴다. [서머셋 모옴, ‘인간의 조건’]

[문제 2] 제시문 (가)와 (나)를 읽고, ‘행복은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라고 하는 주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14∼16줄(350∼400자) 분량으로 논술하시오. (30점)

(가) 인류가 저지르는 죄의 절반 이상은 권태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도덕주의자들은 권태를 심각한 문제로 여긴다. 권태가 생겨나게 되는 필수조건 중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상상하게 되는 지금보다 바람직한 상황과 현재 상황의 대조에 있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사람은 권태를 느끼게 된다. 권태의 반대는 즐거움이 아니라 자극이다. 사람들은 환희에 가까운 감격이야말로 즐거움의 필수요소라고 여기기 때문에, 끊임없이 감격을 느끼기 위해서 점점 더 강력한 자극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근본적인 만족감을 표면적인 쾌감으로, 지혜를 얄팍한 재치로, 아름다움을 생경한 놀라움으로 바꾸어 버린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문제는 그 양에 있다. 자극이 너무 적으면 병적인 갈망을 자아내고, 너무 많으면 심신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어떤 어린이나 젊은이가 진지하고도 건설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고, 권태가 반드시 견뎌내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면 아무리 엄청난 양의 권태라도 자진해서 참아낼 것이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세대는 소인배들의 세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느린 변화의 섭리와는 지나치게 멀어진 세대, 모든 생명력이 마치 꽃병에 꽂힌 꽃처럼 서서히 시들어 가는 세대가 될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지의 창조물이며, 우리의 생명은 대지의 생명의 일부분이다. 대지의 생명의 흐름은 매우 더디다. 대지에게는 봄과 여름도 중요하지만, 마찬가지로 가을과 겨울도 중요하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는 수세기에 걸쳐 대지의 생명의 흐름에 적응해 왔다. 그래서 현대의 도시인들이 느끼는 특별한 권태는 대지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나)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노동자의 최저 임금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이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 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상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한다. 가난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가장 열렬한 욕구 충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들락거려도 아무도 주의하지 않는다. 군중 속에 있어도 자신이 오두막 안에 처박혀 있을 때나 다름없이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 지위와 이름이 있는 사람은 온 세상이 주목한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관심을 가진다.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 ‘도덕 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

※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을 밝혔을 때 강항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이런 식으로 남들의 반응에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시를 당하든 주목을 받든, 칭찬을 받든 조롱을 당하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엉터리로 우리를 칭찬하는 소리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여, 다른 사람이 우리가 못났다고 넌지시 암시한다 해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아주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내가 똑똑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바보라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익살맞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따분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중요한 인물이라는 증거도 댈 수 있고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는 증거도 댈 수 있다. 이렇게 흔들린다면 사회의 태도가 우리의 의미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무시를 당하면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고개를 쳐들며, 미소나 칭찬과 마주치면 어느새 역전이 이루어진다. 혹시 남의 애정 덕분에 우리 자신을 견디고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를 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동료 한 사람이 인사를 건성으로 하기만 해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기만 해도 우리 기분은 시커멓게 멍들어 버린다. 누가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과일 바구니라도 보내주면 갑자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는다.

[알랭 드 보통, ‘불안’]

[문제 3] 위의 제시문에서 필자는 개인이 일반적으로 자기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서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보고 있으며, 그리고 그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14∼16줄(350∼400자) 분량으로 논술하시오. (25점)

[문제 4] 우리가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각자의 견해를 14∼16줄(350∼400자) 분량으로 논술하시오. (25점)

이호곤 청솔학원 논술연구모임 ‘일이관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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