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학생 어떤책 읽나] 판타지 소설에 빠진 상아탑

  • 입력 2005년 4월 21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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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및 일본소설은 쨍쨍, 교양도서는 먹구름.’ 2000∼2004년 5년간 대학도서관의 대출도서 목록을 통해 본 대학생들의 독서성향을 나타내는 기상도다. 통속소설과 일본소설의 약진 앞에 인문학적 교양서적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전문가들은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사 및 분석 과정에서 한기호(韓淇皓)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박재환(朴在煥) 도서출판 에코리브르 대표, 송승호(宋丞鎬) 도서출판 학고재 편집부장, 허남진(許南進) 서울대 중앙도서관장, 김승옥(金承玉) 고려대 중앙도서관장 등이 도움말을 줬다.

▽소설로 교양을 쌓는다?=송 부장은 “대학도서관의 대출순위가 시중 도서대여점의 순위와 거의 비슷하다”며 “대학도서관이 소설대여점으로 전락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인터넷 소설이 등장한 1990년대 중반 이후 두드러졌다. 특히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대다수 학생들이 전공서적이나 수험서를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가벼운 소설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 대학 측의 분석이다.

종합순위 1위를 차지한 ‘묵향’의 저자 전동조 씨가 자신의 책에서 “내 책은 지명이나 인명 따위를 외우느라 앞쪽을 다시 뒤질 필요가 없도록 쓰였다”라고 한 말은 최근 대학생의 독서성향을 함축적으로 나타내준다.

판타지 소설의 마니아라는 연세대 경영학과 3학년 김모(21) 씨는 “영상세대에겐 다양한 캐릭터와 빠른 전개가 특징인 판타지 소설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며 “상대적으로 문장을 여러 차례 곱씹어 읽어야 하는 인문서적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도서관은 학생들의 독서 풍토를 바로잡기 위해 2003년부터 아동물, 음란물과 함께 통속소설도 구입 대상에서 제외했다.

▽일본 책자의 약진=연도별 대출순위 비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류(日流) 현상’이다. 2004년 종합 대출순위에 오른 책 가운데 25%가 일본 책. 2004년 서울대와 고려대의 대출순위 20위 내 8권이 일본 책이다. 같은 해 서강대 7권, 한양대 6권 등 대다수 대학에서 일본 책의 약진이 돋보인다.

이 같은 현상은 출판계의 흐름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 한 소장의 설명.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 번역돼 출간된 일본 책은 1990년 774종에 불과했으나 1993년 1064종, 1997년 2465종, 2001년 5239종으로 급증했다.

일본 작가 특유의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스토리 전개가 젊은이들의 정서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런 흐름에 대해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 소장은 “상당수 일본소설은 등장인물이 2, 3명에 불과할 정도로 원초적 인간관계만을 다룬 경우가 많다”며 “사회와의 관계가 결여된 일본소설을 비판적 시각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처세엔 관심 없다?=교보문고 등 일반 서점에서 집계한 베스트셀러 순위과 비교할 때 대학 대출도서 순위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실용서적이 아예 없다는 것. 지난해 서점가에서 큰 인기를 모은 ‘아침형 인간’이나 ‘10년 후 한국’과 같은 처세 및 경영·경제 관련 서적은 물론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나 ‘화’ 등 명상서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직장인들처럼 생활 현장에서 오는 고민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의 삶은 내 방식대로 즐긴다’는 신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이 반영된 결과로도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그나마 대하소설이 종합순위에 상당부분 포함돼 있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긴다.

김 관장은 “판타지 소설 일색 속에서 ‘로마인 이야기’나 작가 조정래 씨의 대하소설들이 포함돼 있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며 “이들 작품은 작가가 수년간 쓴 역작”이라고 말했다.

또 종합순위 20위 안에 든 책의 대다수가 시리즈 도서 또는 대하소설인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로 단행본으로 나오는 교양서적은 직접 구입해 보고 시리즈 도서의 경우 빌려 본다는 ‘긍정적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허 관장은 “대학에선 무엇을 빌려보느냐는 문제보다 책 자체를 읽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 어떻게 조사했나

본보는 건국대 경북대 고려대 동국대 부산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아주대 연세대 중앙대 충남대 한국외국어대 한양대 등 14개 대학으로부터 2000∼2004년 5년간 대학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도서 100위의 목록을 입수했다. 이 자료를 토대로 1위 도서엔 20점, 2위 도서엔 19점 등 순차적으로 점수를 부과해 합산하는 방식으로 연도별 종합순위를 20위까지 집계했다. 또 5년간 점수를 합산해 5년간의 종합순위를 만들었다. 시리즈물은 하나의 도서로 취급했다.



대학마다 독서프로그램 마련 고심

8일 오후 3시 고려대 중앙도서관의 한 세미나실. 이 대학 학생 8명과 이준섭(李準燮·불문학과) 교수가 열띤 독서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책은 전공이나 학술서적이 아닌 베스트셀러 소설 ‘다빈치 코드’.

토론회에 참석한 조민영(21·여·국문학과) 씨는 “교수님의 배경 설명과 친구들의 다양한 해석을 듣고 보니 이 책의 재미를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대학마다 학생들을 책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묘안 짜기에 골몰하고 있다.

고려대 중앙도서관은 책 한 권을 선정해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함께 토론하는 독서 프로그램을 올해 처음 마련했다. 이번 학기에 선정된 책은 ‘다빈치 코드’를 비롯해 ‘그리스인 조르바’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 모두 7권.

이 교수는 “처음 여는 독서토론회인 만큼 가급적 쉽고 재미있는 책을 선정했다”며 “다양한 책 읽기를 통해 사고의 폭과 자신의 관심사를 점점 넓혀가도록 하는 것이 토론회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성신여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교양 독서토론회를 열고 있다. 독서토론회에 참여하는 학생에게는 선정 도서를 무료로 나눠주고 토론회가 열릴 때마다 우수토론자를 선정해 문화상품권을 주고 있다. 학기말에는 최우수 토론자를 뽑아 장학금도 수여한다.

한국외국어대는 지난해 4월부터 ‘모바일 도서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휴대전화 부가서비스를 통해 책 예약과 대출 연장은 물론 ‘칼의 노래’(김훈 저)와 ‘봉순이 언니’(공지영 저) 등 베스트셀러 20여 권을 읽을 수도 있다.

충남대 이응봉(李應奉) 도서관장은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글 읽기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며 “이제 도서관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의 독서문화를 선도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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