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시설 퇴소 앞둔 청년들 2박3일간 ‘홀로서기 여행’

  • 입력 2005년 1월 19일 18시 04분


여행 마지막 날인 19일 아침, ‘GOA(고아)’조 소속 청년들이 숙소인 경북 경주시 진현동 동양유스호스텔 마당에서 희망찬 새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경주=장강명 기자
여행 마지막 날인 19일 아침, ‘GOA(고아)’조 소속 청년들이 숙소인 경북 경주시 진현동 동양유스호스텔 마당에서 희망찬 새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경주=장강명 기자
“여행을 하며 앞으로 닥칠 미래보다 지난날을 차분하게 생각해 봤다. 불투명한 미래를 고민하느라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여태껏 어떻게 살았는지를 잊고 살았음을 깨달았다. 그건 내가 보육원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이우성 씨·가명·19)

서울 시립 아동양육시설에서 살다 만 18세를 넘겨 정착금 300만원만 들고 사회로 진출해야 하는 청년 98명이 17∼19일 ‘유·소년기에 아듀를 고하는 고별여행’을 했다.

서울시 등이 주선한 이번 여행에서 이들은 강원 정동진 바닷가, 포항제철소, 경주 불국사 등을 돌아보며 ‘진짜 세상여행’을 앞둔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17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격려사를 듣고 버스에 올라 도착한 곳은 강원 강릉시 송정동의 참소리박물관. 손성목(孫成木·60) 관장이 40여 년 동안 모아온 축음기 1400여 점과 음반 15만 장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손 관장이 에디슨이 만든 축음기를 가리키며 “여러분도 에디슨처럼 노력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말했지만 아직 서먹한지 청년들은 조용했다.

“저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은 수없이 했습니다. 그러면 곧바로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이어졌죠. 그 질문엔 답이 없었어요.”(박정훈 씨·19세·가명)

강원 속초시에 있는 서울시공무원수련원에 여장을 푼 것은 이날 오후 8시경. ‘친교의 밤’ 시간이 마련돼 16, 17명씩 한 조가 돼 조장, 조 이름과 구호를 정했다. 하지만 3조에서는 아무도 나서지 않아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이우성 씨가 “내가 조장 해도 되냐”고 말을 꺼냈다.

“조 이름은 영어로 ‘G, O, A’ 어때? 우리말로 읽으면 ‘고아’조. 우리 다 같은 처지잖아. 그걸 언제까지 부끄러워할 수만은 없잖아.”

같은 조 16명의 얼굴에 일순 긴장감이 돌았다. 하지만 곧 모두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했다.

이어진 댄스 경연대회. 다른 조 학생들이 쑥스러워할 때 ‘GOA’조는 17명이 모두 열정적으로 람바다춤을 춰 1등을 차지했고 스키장 할인권 17장을 상품으로 받았다.

18일 아침 정동진 바닷가를 산책했다. 바람이 쌀쌀한데도 청년들은 바지를 걷고 바다로 들어갔다.

오전에 도착한 포스코 포항제철소에는 전날 내린 눈이 쌓여 있었다. 안내를 맡은 포스코 직원은 “포항에 눈이 내린 건 몇십 년 만에 처음”이라며 “여러분은 행운아”라고 말했다. 임영준(林永俊·49) 한국인력개발 영남본부장이 ‘나는 주인공’이란 주제의 강연을 했다.

“사람을 당당하게 살게 하는 것은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가치입니다. 직업은 변호사든 의사든 상관없어요. 삶에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 그 목적이 뭐냐, 그 목적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냐 하는….”

강연 후 다함께 ‘브라보 마이 라이프’란 노래를 합창했다. 김지혜 씨(19·가명)는 “쑥스러워도 다른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었다”며 “서울로 돌아가도 이때 기분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뒤풀이가 끝난 뒤 GOA조 몇몇은 바람을 쐬겠다며 숙소를 나왔다. 슬리퍼를 신은 채 다들 말없이 눈길을 한없이 걸었다.

“앞으로 열심히 살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는 건데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장 해야 할 일이 다급했으니까. 학교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했던 게 후회돼요. 내가 고아라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내 가치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앞으로는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를 드러내면서 살고 싶어요.”(이광민 씨·19)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