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국보법폐지 권고]국가기관 첫 공식의견…강제력 없어

  • 입력 2004년 8월 24일 18시 51분


코멘트
전면폐지 권고국가인권위원회 김창국 위원장이 24일 오전 서울 중구 인권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가보안법의 전면 폐지를 국회의장과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하기로 한 방침을 밝히고 있다.- 신원건기자
전면폐지 권고
국가인권위원회 김창국 위원장이 24일 오전 서울 중구 인권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가보안법의 전면 폐지를 국회의장과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하기로 한 방침을 밝히고 있다.- 신원건기자
국가인권위원회가 24일 정부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함에 따라 그간 끊임없이 논란이 돼 왔던 국보법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국보법 개폐를 둘러싼 논란은 정치권과 법조계를 중심으로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 그리고 국보법 폐지를 주장해 온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17대 국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구체화됐다.

따라서 인권위의 이날 권고는 국보법 개폐 논란에 ‘권고 이상’의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의미와 파장 및 전망=인권위의 폐지 권고는 말 그대로 권고일 뿐 법적 구속력을 갖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권위법은 ‘권고를 받은 기관은 인권위 의견을 존중해야 하고, 수용할 수 없을 때는 서면으로 이유를 소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 권고는 특히 국가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보법 폐지 의견을 낸 것인 데다 정치권의 활발한 국보법 폐지 움직임과 맞물려 상당한 힘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 또 재독학자 송두율(宋斗律)씨와 11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의장 정재욱씨(24)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 등 최근의 국보법 사건에서 나타난 법원 판결의 변화와도 흐름을 같이한다.

이 문제는 다음달 정기국회에 정치권이 국보법 관련 법안을 어떻게 상정하며 국회가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의해 마무리되겠지만 인권위의 권고는 여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국보법 폐지 법안이 상정될 가능성이 상당히 커진 것이다.

현재 국보법 개폐와 관련해 열린우리당은 폐지 후 형법 보완을, 민주노동당은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은 폐지 후 대체입법, 한나라당은 일부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법무부 및 검찰 입장=인권위의 권고대상이 정부이며 이 문제의 주무부처는 법무부다. 그러나 법무부는 “정치권의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한 법무부 당국자는 “국회에서 정식 논의가 이뤄지면 의견을 표명하게 될 것”이라면서 “하지만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세력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시스템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현재 이 문제와 관련한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대비한 법률 검토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한편 대검 공안부 관계자는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언급은 적절치 않다”며 말을 아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부 관계자들도 “할 말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지방의 한 중견 간부는 “현 상황에서 국보법 개정 수준을 넘어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 같다”며 “국가의 존립이나 근간과 관련된 문제인 만큼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권위 결정의 배경=이번 인권위의 권고 결정은 사실 어느 정도 예견돼 왔다.

인권위는 이미 지난해 1월 사회보호법, 비정규직 문제와 함께 국보법 개폐 문제를 3대 주요 인권 현안으로 선정했고 올해 5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함께 국보법으로 인한 인권침해 사례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유엔 등의 국보법 개폐 권고도 이번 결정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인권위는 이번 폐지 권고의 결정 근거로 △제정 개정 과정의 정당성 상실 △죄형법정주의 및 행위형법 원칙 위배 △사상과 양심의 자유 등 인권 침해 △국보법 폐지시 우려되는 공백에 대한 형법의 의율 가능 등을 꼽았다.

국보법은 1948년 정부 수립 4개월 만에 일제강점기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만들어졌다. 인권위는 이 법이 당시 형법 제정 이전에 임시로 제정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개정 과정도 1958년의 ‘2·4파동’ 등 날치기 통과로 국민적 합의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게 인권위의 시각이다.

법률적 측면도 문제가 됐다. 국보법 제2, 3, 4조 등은 범죄행위의 실행 전 단계인 ‘예비·음모’까지 처벌토록 규정하고 있어 근대 형법의 ‘행위형법의 원칙’을 위배하는 심정형법이라는 것.

제10조인 불고지죄도 양심의 자유에 포괄된 ‘침묵의 자유’를 부정하고 있는 대표적인 악법 조항이라고 인권위는 지적했다.

인권위는 이 밖에 국보법이 폐지돼도 기존 형법의 내란 및 외환 관련법규로 충분히 법률적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점 등을 폐지 근거로 들었다.

인권위 김창국 위원장은 “판단에 있어 이데올로기적인 선입견을 배제하려고 노력했으며 법 운영과정에서 벌어진 반민주성과 인권침해 등에 초점을 맞췄다”고 강조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조용우기자 woogija@donga.com

정양환기자 ray@donga.com

국가인권위원회의 주요 정책권고 사항
일시 권고사항 내용
2003년 5월 17일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관련 의견 표명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게 NEIS의 사생활 비밀침해, 개인정보 누출에 대한 보안체계 강화조치 강구 권고
2003년 10월 24일 테러방지법 수정안 반대의견 표명 국회에 수정안에 있는 ‘특수부대의 출동요청 및 정보기관의 권한 강화’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소지가 있다며 반대 의견
2004년 1월 13일 사회보호법상 보호감호제도 폐지 권고 국회의장과 법무부 장관에게 보호감호소를 없애고 치료감호 등에 대한 대체법안 마련 권고
2004년 2월 17일 정치관계법 및 개정안에 대한 의견 표명 인터넷 실명제 도입 반대, 선거연령 하향 조정 등을 골자로 하는 정치관계법에 대한 의견 표명
2004년 4월 29일 납북자 가족 관련 특별법 제정 권고 국회의장과 국무총리에게 납북자 가족 관련 실태파악 및 진상규명, 명예회복 및 보상을 골자로 한 특별법 제정 권고

(자료:인권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