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칼럼]부모가 무슨 죄인이냐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1월 30일 18시 08분


이제 공부 열심히 하라고 아이들 다그치기도 힘들게 됐다. 강남 사는 고학력 고소득 부모를 둔 학생들이 서울대 많이 합격한다는 조사가 나온 뒤다. 자식한테 “내가 공부 못하는 건 부모 탓”이라는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다.
‘학력 대물림’이 실증적으로 확인된 뒤 고교평준화 폐지 논쟁이 다시 뜨겁다. 강남 안 사는 학생들에게도 서울대 갈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게 폐지론자의 주장이다.
▼학력 계급 세습은 세계 추세 ▼
평준화를 없앤대도 고학력 고소득 집 아이들이 일류대 잘 가는 경향은 달라지지 않을 거다. ‘좋은’ 과외를 받아서만이 아니다. 운좋게 부모에게 명품 유전자 물려받아 머리 괜찮고, 어려서부터 온갖 뒷받침에 컴퓨터 책 등 ‘문화자본’ 혜택을 받아 온 중상류층 자제가 명문대 잘 가는 건 미국 영국은 물론 독일도 마찬가지라는 조사가 있다.
세계인과 경쟁해야 사는 지식사회로 접어들면서 고학력이 고소득으로 연결되고 계급으로 재생산되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추세다. 심지어 미국의 사회학자 마이크 새비지는 전문직 부모를 둔 경우 실력이 좀 떨어져도 전문직을 갖게 될 기회가 노동자 집안 자녀보다 20배 높다고 했다. 보통 부모로서는 욕 나오는 조사들이다. 세상이 공평해지려면 고교뿐만 아니라 대학도 ‘뺑뺑이’로, 직업은 제비뽑기로 정하자는 주장이 나올 판이다.
그러나 싫어도 인정해야 할 점이 있다. 사회를 이끄는 것은 엘리트이고 이런 엘리트를 기르는 교육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 나라의 ‘휴먼캐피털’이 경제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그만한 보상을 받는 게 배는 좀 아파도 신경제 논리상 당연한 일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을 뒤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학력차별 임금차별을 사회악으로 여기는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파레토원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을 못살게 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잘살게 하는 변화는 좋은 것이라는 경제학 논리다. 사실 내 자식이 실력 없는 건 다른 아이들이 실력 있기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가 잘살아서 내가 못사는 것도 아니다. 잘나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부(富)는 결국 사회 전체로 돌아온다.
내 아이가 공부 못하는 게 원통하다고 똑똑한 남의 아이까지 엘리트교육 받을 기회를 뺏는 건 옳지 않다. 평등이란 기회에 대한 평등을 말한다고 믿는 이가 적지 않지만 엄밀히 보면 틀린 얘기다. 가난하거나 IQ 낮게 태어나고 싶은 사람 없었어도 어떤 사람은 그렇게 태어났고 그게 인생이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결과에 대한 평등까지 요구한다면 얌체다. 평등이란 프랑스혁명정신에 나타나듯 능력에 따른 평등이 되어야 정당하다.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바로 교육일진대 우리는 능력과 상관없이 똑같이 교육하려 든다. 아이들을 우리 세대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살게 하는 죄를 짓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능력에 맞는 교육을 받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
평준화 폐지만이 능사는 아니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국의 학교를 강남 수준으로 만들면 된다. 정부에선 분명 재원부족을 들먹이며 난감해 할 것이나 불법 정치자금 받은 정치인들이 그 돈 다 토해내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분이 그분들’인데 정책으로 채택될 리 만무하다.
▼부모에게 학교선택권 주라 ▼
이게 안 된다면 강남 안 사는 사람들도 ‘8학군 같은’ 학교에 갈 수 있게 학부모에게 선택권을 주기 바란다. 공립학교는 평준화로 두되 부모가 원하는 교육을 하는 자립형 사립고, 특목고, 대안학교를 많이 만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입학시키는 거다. 대학에도 학생선발권을 돌려줘서, 환경이 불우해 실력 계발은 좀 못했어도 가능성 있는 인재도 뽑고 돈 많아 비싼 학비 낼 학생들도 받아들여서는 학교의 명예를 걸고 휴먼캐피털로 기르게 해야 한다. 그런 능력 없는 대학은 퇴출시켜야 학력 인플레도, ‘이태백’도 줄어든다.
학생들에게는 경쟁하라면서 학교는 경쟁도, 평가도 않고 공교육 잘 되기를 바란다면 철면피나 다름없다. 품질도 나쁜 교육을 놓고 이에 관한 모든 결정을 관에서 독점하는 건 국민을 졸(卒)로 보고 통제권을 놓지 않으려는 관리들과 게으르고 무능한 교육자의 합작음모다. 교육을 이 지경으로 만든 쪽은 멀쩡한데 왜 부모만 죄인이 돼야 하는가.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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