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고문한 北에 이겼다는걸 보여주고 싶어 목발 치켜들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트럼프 국정연설장의 ‘자유 아이콘’ 탈북자 지성호 씨

채널A ‘이만갑’ 출연해 탈북 과정 소개 탈북자 지성호 씨(무대 오른쪽)가 2014년 1월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해 목발에 의지해 탈북하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채널A ‘이만갑’ 출연해 탈북 과정 소개 탈북자 지성호 씨(무대 오른쪽)가 2014년 1월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해 목발에 의지해 탈북하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지난달 30일 미국 의회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호명을 받고 목발을 치켜들어 세계적 관심 인물이 된 탈북자 지성호 씨(36). 국정연설 하루 뒤 백악관이 마련해준 숙소에 있던 지 씨와 통화가 됐다. 북한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한 그의 스토리가 트럼프 대통령의 입을 통해 전달되던 감동의 순간에 그는 아직 머물러 있었다.

―목발을 치켜든 건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인가.

“목발은 아버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만들어주신 유품이다. 북한은 장애인인 나를 천대하고 고문했지만, 이렇게 살아남아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불행했던 한 개인을 존중하고 아픔을 덜어주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감동스러웠다.”

―미국 대통령의 국정연설 현장이어서 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인 현장에 초청받은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한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행사로 알고 있는데, 외국인이 초대받아 가슴이 벅찼다. 행사 뒤에는 많은 상·하원 의원이 와서 악수하자고 해 인사도 나눴다.”

―그동안 겪었던 어려움이 떠올랐을 것 같다.

“나는 굶주린 환경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목발을 짚고 탈북해 대한민국으로 왔다. 한국에서는 장애인과 탈북자라는 두 가지 핸디캡을 갖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지만 현실에 무릎 꿇은 적은 없다. 그런 내 삶을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에서 언급해주니 더 감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 도중 이름을 부른 순간을 기억하나.

“숨이 탁 멎는 느낌이었다. ‘성호’라고 부를 때 떨고 있을지 모르는 내 마음을 안심시켜 주려고 하는 느낌을 받았다. 친구처럼 불러줘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트럼프 대통령과는 연설 전에 따로 만났나.

“백악관 접견실에서 만났다. 대기실에 대통령의 초대를 받은 영웅분들이 모여 있었다. 외국인인 내가 첫 번째로 들어가 대통령과 사진을 찍게 돼 놀랐고, 다른 분들께 미안했다. 멀리서 왔으니 배려해주나 보다 생각했다. 접견실로 들어갈 때 심리적으로 위축됐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편하게 하라며 윙크를 해줬다. 그러면서 ‘당신에 대해 잘 안다’고 하더라. 진심이 느껴졌다.”

―어떤 행동이 진심으로 다가왔나.

“트럼프 대통령이 나를 꽉 안아줬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마치 아버지가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국정연설이 생중계되면서 유명인사가 됐다.

“워싱턴 시내를 걸어가는데 자전거를 타던 사람이 다가와 ‘헬로, 헬로’ 하면서 나를 불렀다. 그러면서 ‘북한에서 왔냐’고 묻더라. ‘맞다’고 했더니 ‘어제 TV에서 당신을 봤는데 너무 감동적이었다. 사진을 함께 찍어도 되냐’고 하더라. 좀 무서웠지만 응해줬다. 다른 분들도 ‘어제 TV를 보고 눈물났다. 북한 주민을 돕고 싶다’고 해서 보람을 느꼈다.”

―어떻게 미국 정부의 초대를 받게 됐나.

“오게 된 과정은 모두 보안상의 이유로 밝힐 수 없다. 지난해 백악관 앞에서 꽃제비 연극을 할 때만 해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정부기구(북한인권단체 NAUH·나우)에서 일하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살았는데…. 미국이 내 삶과 활동에 대해 지켜본 것 같다.”

―북한에서 투옥됐다가 미국으로 송환돼 사망한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부모도 만났다고 들었다.

“웜비어의 부모님이 나를 보고 많이 우셨다. 사실 지난해 꽃제비 연극을 위해 웜비어의 고향인 신시내티를 찾았다. 어렵게 웜비어 묘를 찾아 헌화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 사진을 웜비어 동생에게 보여줬는데, 부모님이 전해들은 모양이더라. 웜비어 부모님은 ‘북한 주민을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며 나에게 함께 일하자’고 했다.”

―웜비어 부모로부터 선물도 받았다고 들었다.

지성호 씨가 지난달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정연설장에서 나란히 앉았던 고 오토 웜비어 씨의 부모에게 선물로 받은 넥타이. 웜비어 씨가 재작년 북한에
 갔을 때 맸던 것이다. 동아일보DB
지성호 씨가 지난달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정연설장에서 나란히 앉았던 고 오토 웜비어 씨의 부모에게 선물로 받은 넥타이. 웜비어 씨가 재작년 북한에 갔을 때 맸던 것이다. 동아일보DB
“웜비어가 북한에 갔을 때 맸던 넥타이를 가져오셨는데, 아마 의회 행사 때 보여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걸 나한테 주셨다. 아름다운 청년의 억울한 죽음을 상징하는 유품을 받게 돼 마음이 숙연해졌다. 웜비어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매고 다닐 생각이다.”

―미 의회에서 북한 인권 실태를 보여준 것이 북한 주민의 인권을 개선하는 데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나.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과 전 세계가 북한 인권에 더 큰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의 뜻이 모여 잘못을 지적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 북한 주민도 자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많은 일정을 소화했는데 몸 상태는 어떤가.

“몸을 혹사한 듯하다. 한쪽 다리에만 힘을 줄 수밖에 없으니 무릎 연골이 안 좋은 듯하다. 계단도 못 올라갈 정도다. 그렇지만 북한 주민의 자유를 완성하는 그날을 위해 아직 할 일이 많다.”

워싱턴=박정훈 특파원 sunshade@donga.com
#북한#미국#의회#트럼프#국정연설#목발#지성호#탈북자#웜비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