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따져 봐도 최순실 씨의 조기 귀국은 ‘묘수’였다. 그의 출현은 기습 출두로 수사진을 얼어붙게 했던 과거 거물급 정치인들의 계략을 떠올리게 했다. 피의자 조서에 채워 넣을 물증도 확보하지 못한 검찰의 허를 제대로 찔렀다. 어차피 특검으로 넘어갈 판. 수사팀 내부에 김이 빠진 틈도 노렸다. “형제가 다투는 집안 정리만 해줬다”는 평이 나온 롯데 수사 직후라 수사의 칼날은 무딜 대로 무뎌져 있던 터였다.
더구나 국민에게 ‘집단 자괴감’을 안겨준 국정 농단 의혹은 옷자락만 살짝 보여준 시점이다. 지금 수사팀 역량으로는 최 씨의 금전적 이득을 제외한 부당한 인사 및 정책 개입은 밝혀내기도 어렵고 기소도 힘들다. 최 씨 소환 사흘째 수사팀은 위법 행위 4개를 가까스로 포착했지만 인사나 정책 농단은 걸러내지 못했다. 최 씨의 직권 남용 혐의도 법정에서 무죄가 나올 확률이 높은 범죄다. 부장판사 출신인 박영화 변호사는 “최 씨가 민간인이어서 국정 농단에 대해선 수사나 재판 실무에서 책임 추궁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난 여론과 법률적 단죄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최 씨의 10분 출두 쇼는 10년 감형까지 기대할 수 있는 남는 장사였다.
국정 농단에 상응하는 법적 처단이 뒤따르지 못하면 상당수 의혹은 특검 수사 때까지 잠복하거나 묻힐 가능성이 있다. 최 씨 일족(一族)의 개입 의혹은 ‘K’로 시작되는 사업부터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기 거래, 평창 겨울올림픽, 기업 구조조정에까지 뻗쳐 있다. 어떤 의혹이든 최 씨 일족의 그림자가 겹쳐지면 어렵지 않게 ‘최순실 게이트’가 되는 형국이다. 그야말로 그 일족의 ‘주술’에 걸려 있다.
그 주술을 당장 풀어낼 뾰족한 방법은 보이지 않지만, 검찰 수사만 기다리다가는 헌정 중단 사태가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 정부의 대처만 봐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통령의 ‘불쑥 개각’으로 현직 총리까지 힘을 못 쓰는 상태에서 공무원들은 다른 나라 일인 양 손을 놓고 수사를 관전하고 있다.
최 씨 일족의 농단은 국민이 피와 땀으로 세운 민주국가의 정체성을 훼손했다. 외국에도 대한민국이 ‘샤머니즘 국가’로 비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공무원들 사이에서 ‘최 씨 일족 일망타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들어보기 힘들다. 비상시국으로 가고 있는데도 그렇다. 여느 때 같으면 경찰 국가정보원 금융감독원 등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본부’니 ‘긴급회의’니 하면서 수습에 나서는 모습이라도 연출했을 것이다.
한 고위공무원은 “최 씨 일족 부역자를 가려내 수사 의뢰하는 것은 정부 부처에서도 할 수 있겠지만 문화체육관광부의 최순실 사업 떨어내기처럼 요식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최 씨를 도운 고위 간부들이 그대로 요직을 지키는 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안종범 씨처럼 최 씨 세력에 기대 국정을 좌우했던 공무원, 그중에서도 최 씨의 실체를 알고 그에게 아부하며 양지를 찾아간 공무원들은 이번에도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며 법망을 빠져나가 국민을 무기력증에 빠뜨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 씨 ‘도우미’나 아첨꾼 공무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조사를 통해 법이 정한 최대치로 처벌해야 한다. 이들을 단죄하지 않으면 최 씨 일족의 주술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재발할 우려가 있다. 이들의 단죄로 최 씨 일족의 공동 범죄를 수사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
공무원 사회에서 최 씨 같은 사람을 만나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며 법을 지키는 문화가 살아나고 ‘최 씨 일족 프리존’을 선언하는 정부부처가 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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