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의 휴먼정치]언제부터 우린 말만 앞서는 나라가 됐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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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논설위원
박제균 논설위원
임진(壬辰)년 그해, 의주로 피란길을 떠난 선조가 임진강 나루에 이르렀다. 가슴을 치며 중신들에게 묻기를 “장차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이항복이 답한다. “의주로 가서 머물다 팔도가 함락되면 명나라로 가는 것이 가할 줄 아옵니다.” 류성룡이 막아섰다. “불가합니다. 임금께서 우리 땅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그때부터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송복의 ‘조선은 왜 망하였나’)

선의 기대려는 사드 無用論

류성룡의 충절(忠節)이 돋보이는 대목이지만, 왜(倭)가 침략할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던 조정이 임금의 피란처를 두고도 갑론을박한 일은 돌아볼수록 한심하다. 되씹고 싶지 않은 치욕의 역사가 떠오른 것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배치를 둘러싼 국론 분열상 때문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국가 안보가 걸린 중대사를 두고도 서로 치고받는 나라가 됐을까. 중국 언론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필리핀 손을 들어준 국제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을 앞장서 비난한다. 사회주의 국가니 그렇다고 치자. ‘언론 자유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중국 주장이 일리 있다’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사드 배치 반대론자의 주요 논거는 ‘실효성이 없다’는 것. 성능이 확인되지 않은 데다 고작 1개 포대 48기의 요격 미사일로 1000여 기의 북한 미사일을 막아내는 것이 역부족이라는 논리다. 어차피 방어가 안 되는데, 공연히 중국을 자극해 경제 보복 등의 빌미를 줘선 안 된다는 얘기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현재 대한민국 상공은 북한의 장사정(長射程) 방사포와 스커드, 노동 미사일 등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다. 그러나 동네 깡패에게 힘이 달리니, 공연히 대항하려다 깡패 뒤의 보스를 자극하지 말자는 것처럼 무책임한 주장이다. 기초체력을 키우든, 신무기를 갖출 경제력을 키우든 자강해야 산다. 상대방의 선의(善意)에만 기댔던 나라는 패망을 피하지 못한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사드를 시작으로 패트리엇(PAC-3) 요격 미사일이든, 이지스함에서 발사되는 SM-3 미사일이든 다층 방공망 체계를 확보해야 한다.

일각에선 강대국 사이에 끼인 지정학적 위치가 분열 유전자를 우리의 DNA에 각인시켰다는 주장도 나온다. 스위스가 영세중립국을 표방한 것은 독일(북) 프랑스(서) 이탈리아(남) 오스트리아(동) 같은 서구의 전통 강국에 둘러싸여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명까지 목숨을 바치는 용병의 전통과 민간인도 48세까지 매년 20일씩 실전 훈련을 받는 시스템으로 키운 만만찮은 군사력으로 주위에서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나라가 됐다.

차기 대권을 꿈꾼다는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은 사드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주장하다 말이 꼬이자 스위스 국민투표 사례를 거론했다. “우리 민도(民度)가 스위스보다 낮다는 얘기냐”고 엉뚱한 얘기까지 끌어댔다. ‘구덩이에 빠지면 아래를 더 깊이 파지 말라’는 미국 속담처럼 실수를 만회하려다 또 실수하는 법이다.

웬 ‘스위스 민도’ 타령인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등 각종 국론 분열 사례를 돌아보자. 말만 앞세워 반대하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잊어버리곤 하지 않았던가. 류성룡은 임란(壬亂) 중인 1595년 이렇게 개탄했다. “우리나라에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오래 견뎌내는 것이 없다. … 의지가 굳게 서 있지 못하고, 계획이 정해져 있지 않아… 아침엔 갑의 말을 듣고 일을 진행하다가 저녁엔 을의 말을 듣고 폐지한다.”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류성룡#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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