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문제적 인간’ 전두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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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이 2006년 10월 26일 경복궁 앞뜰에서 진행된 ‘고 최규하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 참석해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상념에 잠겨 있다. 그의 머릿속을 스쳐간 것은 12·12였을까, 5·17이었을까, 아니면 5·18이었을까.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다. 동아일보DB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06년 10월 26일 경복궁 앞뜰에서 진행된 ‘고 최규하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 참석해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상념에 잠겨 있다. 그의 머릿속을 스쳐간 것은 12·12였을까, 5·17이었을까, 아니면 5·18이었을까.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다. 동아일보DB
《 “각하, 미안합니다.” 1987년 6월 30일 오전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마주 앉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말했다. 전날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한 노 대표의 “미안하다”는 말은 발표 일정을 사전에 알리지 않은 데 대한 사과로 들렸다. 그의 사과는 진심이었을까. 촬영을 끝낸 사진기자단이 회의 장소에서 나온 뒤 문이 닫혔다. 두 사람만의 회담이 시작됐다. 》

26년 전 오늘(29일) 대한민국 역사는 분기점에 섰다. 회사원 ‘넥타이 부대’가 적극 가담한 6월의 시위대는 직선제를 따냈고 민주화는 그 첫걸음을 뗐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2차장이자 5공화국의 실세였던 이학봉 전 의원(75)에게 야당 의원들이 물밑접촉을 시도했다. 이들은 이 전 의원에게 “진짜 이 ‘작품’이 누구 것이냐”고 물었다. 노 대표가 선언을 발표했음에도 야당은 정말 노 대표가 결정했는지, 아니면 전 대통령이 막후에서 주도했는지 정확히 알고 싶어 했다. 누가 주역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그에 맞춰 야당의 향후 대응 전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6·29선언의 주인에 대한 정설은 없다.

그러나 오늘의 화두는 두 사람 중 누가 진짜 6·29선언을 주도했는지가 아니다. 국회는 27일 본회의를 열어 추징금의 시효를 3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직계 가족 명의로 된 부동산 등도 범죄와 연관된 사실이 드러나면 추징하도록 하는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사실상 전 전 대통령을 겨냥한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이다. 전 전 대통령은 1997년 군 형법상 반란·내란과 뇌물수수 등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형과 함께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추징금 가운데 1672억 원은 여전히 미납 상태다. 6·29 아침에 ‘문제적 인간’ 전두환을 들여다봤다.

북한의 1차 핵실험 다음 날인 2006년 10월 10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오른쪽) 초청으로 청와대에 간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부터)이 오찬장으로 가고 있다. 동아일보DB
북한의 1차 핵실험 다음 날인 2006년 10월 10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오른쪽) 초청으로 청와대에 간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부터)이 오찬장으로 가고 있다. 동아일보DB
▼ 全 측근 “전재산 29만원? 그럼 손가락 빨고 살았겠나” ▼

‘오야붕’ 전두환


“그건 모독입니다.”

5공화국 시절 수도방위사령관과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고명승 성우회장(78·전 3군사령관)은 발끈했다. 기자가 전 전 대통령 주변에 여전히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결국은 숨겨 놓은 재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물은 뒤끝이었다.

퇴임 후 25년이 흐른 지금도 전 전 대통령의 서울 연희동 자택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매주 월요일 오전에는 핵심 측근들이 모인다. 이른바 티타임이다. 많으면 12명까지 오지만 대체로 7, 8명이 참석한다. 고 회장을 비롯해 5공의 핵심으로 불린 ‘2허 1이’의 이학봉 전 의원과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76), 장세동 전 안기부장(77), 김진영(75)·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79), 이원홍 전 문화공보부 장관(84), 이상희 전 내무부 장관(81), 유흥수 전 치안본부장(76) 등 5공 시절 청와대, 군, 내각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2허 1이’ 중 허삼수 전 의원(77)은 최근 잘 나오지 않고 있고, 장 전 부장은 한동안 뜸하다가 최근 몇 년 새 다시 나오고 있다.

민정기 전 비서관은 이 모임을 “말동무를 해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나이 70, 80 넘은 분들이 뭐 하시겠어요. 주로 옛날이야기, 군 시절 이야기를 하는 거죠.” 딱히 모임의 주제도 없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하며 건강은 어떤지 물어본다. 전 전 대통령이 외부 손님을 맞았을 때 ‘골방 샌님’같이 세상물정에 어둡지 않도록 여러 정보를 들려주거나, 전 전 대통령이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저렇게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여러 사안에 대해 물을 때 각자의 의견을 말하는 사랑방 같다는 것. 이들에 대해 “여전히 아첨하고 있다”는 소리도 없지 않다. 그러나 75세가 넘은 사람들이 무슨 관직을 할 것도 아니고, 장관을 시켜줄 수도 없는데 무엇을 바라서 모이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들은 전 전 대통령을 어쩌면 한 가문의 ‘오야붕’(두목)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을 몰고 다닌다는 전 전 대통령의 이미지는 경조사 현장에서 두드러진다. 자주 못 보는 측근들에게는 상가(喪家)나 예식장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별 약속 없으면 와라” 하며 동행을 청한다. 빈소에서 식사를 해결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근처의 식당을 단골 삼아 가기도 한다.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을 갈 때는 옆 개포동의 ‘ㅅ’ 국수집,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갈 때는 근처 올림픽파크텔 지하의 한식집, 종로구 동숭동 서울대병원에 갈 때는 효자동 ‘ㅂ’칼국수 등이 그렇다.

결혼식에 갈 때는 혼인을 축하하며 신랑신부에게 잘 살라는 덕담을 담은 ‘축혼문(祝婚文)’을 써주기도 한다. 평소에도 서예를 즐겨 하는 그는 세로로 자를 대가며 붓을 놀리는데 때로는 두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전 재산 29만 원’

전 전 대통령은 제주의 한 고급호텔을 가끔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호텔은 공중에서 보면 포도송이처럼 생겼다고 한다. 객실료는 회원이 아닌 경우 스위트가 하룻밤에 220만 원이고 일반 객실은 40만 원대 중반과 90만∼100만 원대의 두 종류가 있다. 골프 코스가 있어 골프를 즐길 수도 있다.

문제는 한때 전 전 대통령에게는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다고 알려진 점이다. 검찰은 2003년 2월 추징금 미납액(당시 1872억 원)을 내지 않고 있는 전 전 대통령의 재산을 공개해달라고 법원에 요구하는 재산명시신청을 냈다. 이에 따른 재판이 4월 열렸고 그가 제출한 재산목록에는 ‘현금은 없고 예금과 채권을 합쳐 29만1000원’이라고 명시됐다. 그 뒤부터 ‘전 전 대통령의 전 재산은 29만 원’은 하나의 명제처럼 돼버렸다.

전 전 대통령 주변 인사들에 따르면 29만 원은 1997년 금융재산 약 300억 원을 추징당할 때 압류된 통장 중 휴면계좌에서 2003년까지 발생한 이자의 총액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전 전 대통령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형성된 돈이라는 뜻이다. 또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고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는 것. 민 전 비서관은 “2008년에는 그동안 휴면계좌에 이자 4만7000원이 남아서 추징됐다. 그렇다면 왜 그때는 전 재산이 4만7000원뿐이라고 안 했는지 모르겠다”며 반박했다. 그는 또 “검찰이 (재산을 찾다) 안 되니까 뭐든 (추징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해서 2010년에는 강연료 300만 원을 자진 납부했다”고 했다.

그럼 전 전 대통령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 걸까. 이 전 의원은 “영부인(이순자 여사)이 이때까지 손가락 빨고 살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그의 장인인 이규동 전 성강문화재단 이사장은 육군 경리감을 지낸 자산가였다. 이 전 이사장은 생전에 땅 20만 평(약 66만 m²)을 매입해 외아들 창석 씨 명의로 해놨는데 이후 창석 씨가 자신의 누나들에게 이 땅을 나눠줬다고 한다. 이 땅에서 생기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여사는 2004년 130억 원대의 거액을 비밀 관리해 온 사실이 검찰에 적발돼 이를 모두 추징금으로 대납한 적이 있다. 이 여사는 적발 당시 이 돈이 비자금이 아니라 결혼 초기 친정에서 10년을 얹혀살면서 아끼고 모은 돈을 종잣돈으로 해서 키운 자산이라고 해명했다. 검찰은 1995년 비자금 수사 당시 전 전 대통령이 비자금의 상당 부분을 무기명채권 구입에 쓰거나 가·차명계좌에 분산시켰을 것으로 봤다. 이후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뭉텅이 자산이 발견되기도 했다.

‘호화 골프’로 지탄받는 데 대해 그의 주변에서는 나름대로의 해명 논리를 내세운다. 전 전 대통령에게 1년에 한 번 정도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5공 시절 공직을 지냈거나 국회의원을 했던 인사들을 비롯해 전 전 대통령과 일면식이나 인연도 제대로 없는 중소기업인들이 그야말로 줄을 선다고 한다. 이런 이들이 골프를 주선하고 식사를 대접한다. 우리나라 주요 골프장은 전직 대통령에게는 그린피를 받지 않고 있으며 주말보다는 가격이 싼 평일에 주로 치기 때문에 전 전 대통령이 대여섯 명과 함께 와도 그리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해명이다. 200여 명을 데리고 골프를 했다는 소문이 난 적도 있다. 한 단체의 회원들이 골프행사를 평일에 하면서 전 전 대통령을 초청한 일이 와전됐다는 것이다.

사실 전국 주요 리조트는 전 전 대통령에게 회원 대우를 해주거나 회원권을 주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직 대통령이 찾는 곳이라는 게 알려지면 그만큼 광고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다. 제주 고급호텔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초에 세배하러 온 사람들에게 상당한 세뱃돈을 준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민 전 비서관은 “수백 명이 아침부터 들락날락하는데 어떻게 따로 만나서 그만한 액수의 세뱃돈을 줄 수 있겠는가”라며 “찾아온 사람들이 50여 명씩 죽 서서 악수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마련된 커피나 식혜, 떡을 먹고 마시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따로 만나는 인사는 3부요인 정도라고 한다.

전 전 대통령은 1997년 복권이 됐지만 이는 피선거권만 해당할 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받고 있지는 못하다. 대통령 연금도 없다. 경찰에서 경호를 하지만 이는 예우라기보다는 국가적 차원에서 전직 국가원수에게 발생할지 모를 불상사를 방지해 국가기밀의 유출과 국가적 손해를 막자는 차원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당수 국민은 경찰 경호도 국민 세금이라며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정치자금의 ‘운명’

추징금 2205억 원이 확정되고 금융자산 약 300억 원을 추징당한 뒤인 1990년대 후반 또는 2000년대 초반, 전 전 대통령의 가족은 회의를 열었다. 내내 아버지의 굴레가 될 추징금인데 각자 가진 것들을 내놓아 대납을 해서라도 좀 편하게 해드리자고 의견을 모았다. 가족과 창석 씨를 비롯한 친척들이 각자 살 집만 남겨두고 처분할 수 있는 자산을 다 긁어모아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보니 600억 원가량이 됐다. 이 돈으로 추징금을 대납하려니 ‘저 나쁜 놈들. 나머지 1000억 원은 어디에다 숨겨놓고 일부만 내놓고는 오리발 내밀려고 한다’는 지탄을 받을 게 틀림없다는 쪽으로 얘기가 흘러갔다. 오히려 문제만 더 키우는 셈이 될 것 같아 흐지부지됐다고 한다.

1988년 11월 23일 ‘5공 청산’의 책임을 지고 도피성 은둔 길에 나선 전두환 전 대통령(가운데)과 이순자 여사(왼쪽)가 내설악 백담사에 도착해 경내를 둘러보고 있다. 동아일보DB
1988년 11월 23일 ‘5공 청산’의 책임을 지고 도피성 은둔 길에 나선 전두환 전 대통령(가운데)과 이순자 여사(왼쪽)가 내설악 백담사에 도착해 경내를 둘러보고 있다. 동아일보DB
▼ 300억 추징뒤 가족회의… 대납 안해 ▼

한 측근은 “사람들은 ‘아니, 자식들이 노숙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빨리 추징금 족쇄에서 풀어줘야 되는 것 아니냐’고들 한다”며 “하지만 자식들이 갹출해서 일부라도 대납을 하게 된다면 세상은 ‘잘했다’라고 하기보다는 ‘아들, 딸에게 (재산을) 숨겨놓고는 이제야 내놓는다’고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설령 미납한 추징금에 버금가는 액수를 대납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제 보니 숨겨놓은 재산이 더 많이 있었구먼’이라고 힐난할 게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는 더이상 숨겨놓은 재산이 없다는 걸 강조하는 전 전 대통령 측의 일방적인 설명이다. 대통령 재임 중 재벌 총수 등에게서 받은 뇌물로 판단해 재판부가 매긴 추징금 2205억 원에 대해 전 전 대통령 측은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고 대부분 당 운영비와 선거자금, 각종 격려금으로 다 썼다고 주장한다. 이 전 의원은 “1995년 당시 재판 과정에서도 드러났지만 재임 중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 약 500억∼600억 원, 민정당 창당 및 당 운영에 7년간 약 500억∼600억 원, 그리고 1987년 대선을 치를 때 당시 후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약 700억 원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검찰의 1995년 수사 내용과 다르다. 검찰은 전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 7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이 중 5400억 원을 민정당 창당자금 및 운영자금으로 사용하고 퇴임 시 나머지 1600억 원(이자 포함 3000여억 원)을 갖고 나와 관리했다고 발표했다. 즉, 이 전 의원이 주장하는 두 번의 총선, 1987년 대선, 민정당 창당 및 운영에 사용된 정치자금은 5400억 원에 포함되고 검찰이 추징 대상으로 적시한 2205억 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205억 원의 사용처는 여전히 묘연한 셈이다.

과거 20년 이상 전 전 대통령을 보좌하다 지금은 생업에 종사하는 한 측근은 “전 전 대통령이 퇴임하실 때 비자금 일부를 가지고 나오셨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유로 전 전 대통령은 자기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자신이 정치적 보호막으로 쓸 수 있는 세력을 꾸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측근은 전 전 대통령이 정치자금과 자신의 돈은 구분해서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치자금을 개인적으로 쓰거나 자식들에게 증여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얘기다.

측근들은 1970∼1990년대 한국 정치가 당 총재가 책임지고 정치자금을 걷어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국민이 이해해 달라고 하소연한다. 다른 측근은 “언론에서 추징금 문제를 두고 ‘전 전 대통령이 꽁꽁 숨겨두고 잘도 버틴다’는 식으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기에는 그동안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들어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가명·차명계좌가 적발되거나 몰랐던 땅이 나타나는 등 의심을 접을 수 없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또한 전 전 대통령 자제들(3남 1녀)의 재산 형성 과정의 미심쩍은 부분들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다. 이 3남 1녀의 재산 총액은 약 29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최근에는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 씨(시공사 대표)가 2004년 7월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드러났다. 페이퍼컴퍼니 설립 5개월 전에는 검찰이 동생 재용 씨에게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 중 73억 원이 흘러들어 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재국 씨의 페이퍼컴퍼니가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는 추론은 타당하다. ‘예금 29만 원’이라는 재산목록을 법원에 제출한 이듬해인 2004년에는 서울 강남에 땅 51평을 숨겨뒀다는 사실이 드러나 검찰이 압류했다. 처남 이창석 씨와 전 전 대통령 자제들 간의 ‘이상한 거래’도 속속 밝혀지고 있다. 종합편성TV 채널A는 이 씨 명의였던 거액의 부동산이 재용 씨에게 넘어갔고 그 과정에서 수억 원의 세금을 포탈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백담사 그 이후

전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2년 1개월 동안 머물다 하산한 뒤 노 전 대통령이 퇴임했거나 할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과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참여했던 40여 명이 전 전 대통령과 함께 경기도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 라운딩을 마치고 막걸리를 돌리며 회식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전 전 대통령이 “한마디 할 게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며칠 전 밤새 한숨을 못 자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어떤 문제든지 노 대통령 욕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내가 노 대통령 욕을 하면 당신들이 나를 전직 국가원수로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이 후계자로 정해 대통령까지 만들었다고 생각한 노 전 대통령이 5공 비리 청산을 한다며 자신을 백담사로 보낸 것을 그때까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백담사에서 불공을 드리며 ‘원한을 품어 오래 두지 말고 성내는 마음에 머물지 말라’는 법문을 수도 없이 외웠지만 40년 동지의 정치적 배신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며칠 전 자신의 육사 후배이기도 한 어떤 측근에게서 “범인(凡人)이 욕하는 것이야 울화통이 터져서 한다고 이해하겠지만 각하는 국가원수를 지내셨지 않습니까. (쓰라린) 기억까지 잊어버릴 수는 없겠지만 이제 욕은 그만하십시오”라는 말을 듣고는 긴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어떤 측근은 전 전 대통령을 향한 여론과 민심의 비판적 눈초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한 측근은 “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정치를 재개할 뜻이 없었다”면서 “만약 밑에 있던 사람들로 당을 만들어 국회에 10명만이라도 진출시켰더라면 이렇게까지 우리 처지를 대변할 사람이 없었겠느냐”고 토로하기도 했다. 1995년 검찰의 칼날이 전 전 대통령의 목줄을 겨냥한 까닭은 그가 당시 DJ 세력과 정치적 연합을 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 의원은 “전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전 전 대통령이 정치를 재개하려고 했다면 누구한테 먼저 같이하자고 했겠습니까. 저나 허화평, 허삼수 씨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런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 의원 등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DJ와의 연합설은 확실하지 않지만 전 전 대통령이 정치 재개를 꾀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1996년 2월 검찰은 전 전 대통령이 1990년 2월 3당 합당 이후 5공 세력을 재규합해 정치를 재개하기 위해 5공 출신 인사를 비롯한 정치인 200여 명에게 수천만∼수억 원씩 모두 500억 원대의 정치자금을 건넸다고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이러한 사전 정지 작업을 바탕으로 1996년 2월경까지 가칭 ‘원(元) 민정당’을 창립해 그해 4월 총선에 대비한다는 구상을 했던 것이다.

지난해 대선 때는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다음 전직 대통령으로 YS는 만났지만 전 전 대통령은 찾지 않았다고 해서 두 사람이 여전히 불편한 관계라는 추측이 나왔다. 5공 정부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에서 공개적인 추도회를 열지 못하게 하는 등 박 대통령을 ‘핍박’한 것이 이유라는 해석도 곁들여졌다.

그러나 다른 측근은 “사실 박 대통령이 당시 연희동을 찾아오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다만 그때 연희동 자택의 수도 파이프가 새는 등 하자가 생겨 큰 보수공사를 하느라 전 전 대통령이 지방에서 약 보름간 머물고 있었다는 것. 전 전 대통령은 박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대통령) 후보가 되면 보통 바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오지 않아도 된다. 내가 알아서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6·29

‘노태우 회고록’(2011년)에서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10일 이후부터는 직선제와 김대중 씨 사면·복권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고 했다.

“그달 24일 저녁 전 전 대통령이 자신을 청와대로 불러 직선제를 제의하자 ‘옳지! 내가 의도했던 대로 일이 잘 풀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反問)한 것은 전 전 대통령이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하지 않도록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생각에서 쓴 반어법이라고 했다. 그는 전 전 대통령의 직선제 결심을 거듭 확인하곤 “모든 것을 제게 맡기고 관여하지 말아 주십시오. 앞으로 운명은 제가 책임지고 개척해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배석했던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 씨가 큰절을 올렸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29일까지 연희동 집에서 대국민 선언 준비에 골몰했다. 그 사이 청와대에서 불렀지만 가지 않았다.”

[1] 1979년 12월 12일 총격전이 벌어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 앞. [2]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에게 끌려나오는 광주시민들. [3] 1987년 2월 7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 추도회. [4] 1987년 7월 1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거행된 이한열 영결식. [5] 1987년 6월 29일 6·29선언을 발표하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왼쪽). 동아일보DB
[1] 1979년 12월 12일 총격전이 벌어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 앞. [2]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에게 끌려나오는 광주시민들. [3] 1987년 2월 7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 추도회. [4] 1987년 7월 1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거행된 이한열 영결식. [5] 1987년 6월 29일 6·29선언을 발표하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왼쪽). 동아일보DB
▼ “全, 3金 단일화 안될거라 판단… 직선제 수용하라 해” ▼

전 전 대통령 측의 이야기는 매우 다르다.

“전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 결심을 밝힌 날짜는 6월 24일이 아니라 17일이었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은 ‘직선제로 간다면 (대통령) 후보를 사퇴하겠다’고 반대했다. 전 전 대통령은 19일 직선제 수용을 건의한 김용갑 민정수석비서관을 보내 노 전 대통령을 설득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날 오후 늦게 청와대로 불러 단둘이 만났을 때 노 전 대통령이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면서 자신이 민주화 조치를 선언하면 전 전 대통령이 반대하는 모습을 연출해 달라고 했다. 국민을 상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판단한 전 전 대통령은 22일 노 전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나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24일 전 전 대통령은 청와대 별관에서 은밀히 만난 노 전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 결심을 굳히자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 재량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27일 장남 재국 씨가 배석한 가운데 발표 날짜를 29일로 확정했다는 것이다.”

직선제 개헌을 전 전 대통령이 먼저 제의했다는 점 말고는 일치하는 대목이 거의 없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두 사람만이 알겠지만 병석의 노 전 대통령은 사실상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전 전 대통령은 이 사안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그러나 2011년 ‘노태우 회고록’이 나온 뒤 전 전 대통령의 태도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고 한다. 슬쩍슬쩍 6·29에 대해 한두 마디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했다고 한다.

“내가 보니까 야당이 단일후보가 안 되지(싶었다). 단일후보만 돼도 (노태우 전 대통령과) 싸울 만했는데, 단일후보가 안 될 것 같아서 노태우(전 대통령)보고 수용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단지 1987년 6월의 시국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직선제 수용을 노 전 대통령에게 제안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이 전 의원은 “아마 사전에 정보기관을 통해 야당 단일후보 가능성, 직선제를 수용하지 않았을 때의 국민적 파장 등을 다 검토한 뒤에 최종 결론을 내렸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더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6·29선언은 6월 항쟁에 항복한 결과라기보다는 야당 후보가 분열했기 때문에 나온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섬뜩한 말로 들렸다. 역설적으로 야당 후보 분열 가능성이 없었다면 6·29선언은 없었을 것이고, 유혈사태가 빚어졌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회고록

요즘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관련 자료를 찾아달라고 주문을 하고 있다. 그는 퇴임 후 25년 동안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발언을 거의 하지 않았고 언론 인터뷰는 공식적으로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민 전 비서관은 “평생에 있었던 모든 일을 담아서 나중에 어떤 평가를 받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서 남기겠다는 생각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팔순을 넘긴 나이 탓에 회고록이 1, 2년 안에 완성될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나오게 되면 이 여사의 회고록과 함께 출간될 가능성이 있다.

회고록에는 자신을 평생 옭죄고 있는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가 담길 것이다. 그리고 김근태의 고문과 박종철 고문치사, 이한열의 죽음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측근들은 모두 5·18특별법에 의한 YS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란모의라는 것은 없었으며, 광주에서의 발포명령도, 확대계엄령 선포도 전 전 대통령과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전 전 대통령도 이들의 생각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전 전 대통령은 ‘후흑(厚黑)의 대가’일지도 모르겠다. 후흑학은 중국 청조가 멸망하는 시기에 등장한 학문으로 중국 통치술의 성공 원리를 ‘뻔뻔함’과 ‘음흉함’으로 설명한다.

12·12에 성공한 뒤 보안사령부에서 샴페인을 따며 축하를 하던 신군부 장성들의 모습이, 5·18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휘두르는 곤봉을 머리에 맞으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 청년의 모습이 지금도 사람들의 뇌리에 아른거리고 있다. 했던 말을 반복하는 일이 잦아졌다는 전 전 대통령. 그의 회고록엔 과연 어느 정도 솔직한 얘기가 담길까.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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