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한국病이다]<3>독설-낙인찍기에 갇힌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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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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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버려야” vs “인격 파탄자”… 말 펀치 넘은 언어 난투극

“이명박 정권, 확 죽여 버려야 하지 않겠나.” … “악의 무리들, 탐욕의 무리들을 반드시 소탕하러 나아가자.”(2010년 12월 26, 30일 민주당 천정배 최고위원, 당 행사에서 예산안 강행처리와 관련해 정부·여당을 비난하며)

“물러서지 마라 (총알을) 재장전하라(Don’t Retreat, instead reload).”(2010년 3월 23일 세라 페일린 전 미국 공화당 부통령 후보, 자신의 트위터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의 건강보험 개혁 정책을 공격하며)

한국의 천 최고위원과 미국의 페일린 전 부통령후보는 지난해 각각 독설로 정계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올 들어 두 사람의 발언을 놓고 한국과 미국 정치권이 보이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 독설 반성한 미국정치, 수위 더 높인 한국정치


올해 1월 미국 애리조나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 6명이 죽고 민주당 개브리엘 기퍼즈 하원의원이 중상을 입었다. 페일린 전 후보 측은 기퍼즈 의원 등 건강보험개혁법안에 찬성한 민주당 의원 20명을 비난하며 이들의 지역구에 사격과녁판 같은 십자선을 표시한 지도를 인터넷에 올렸다. 그런 가운데 기퍼즈 의원이 총격을 받게 되자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언어가 폭력과 참사로 이어졌다는 정치권 안팎의 비판이 비등했고, 페일린은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피해자 격인 민주당 소속의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서로 공격하거나 비난해선 안 되며 희망과 꿈을 모으는 계기로 삼자”며 단합과 자제를 호소했다. 천 최고위원의 발언에 대해 청와대 등 여권이 ‘패륜아’, ‘인격 파탄자’라고 독설로 맞서고 민주당에선 지도부가 나서 천 최고위원을 옹호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 정치권에서는 ‘과격한 정치언어’를 순화시키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한 예로 일자리를 없앤다는 ‘잡 킬링(job killing)’이라는 표현을 자제한 것이다.

반면 천 최고위원의 독설은 여전하다. 그는 23일에도 “이명박 정권은 지금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아랍 독재자들의 말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세계가 중동의 민주화 열풍이 최악의 독재정권인 ‘김정일 정권’에 미칠 영향을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정일 정권 대신 대한민국 정부를 ‘말로를 조심해야 할 독재정권’으로 지칭한 것이다.

한국정치에서 정치인들의 독설은 때와 장소,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까지 독설 전파의 주요 채널이 되고 있다. 민주당 최문순 의원은 1월 자신의 트위터에 “이명박 정권은 시장의 나쁜 점과 국가의 나쁜 점이 잘못 교배돼 탄생한 유전자 조작 실패작”이라는 글을 올렸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학자는 “우리 정치권은 누구 하나가 독설정치로 죽어나가도 과연 정신을 차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독재자’ ‘막가파’ ‘거짓말의 달인’… 대변인들 논평 뜯어보니


동아일보가 서강대 이현우 교수(정치외교학과)의 도움을 얻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한나라당과 민주당 대변인의 논평 182개와 274개를 각각 분석했다. 그 결과 당 대변인의 논평은 자기 당의 정책과 주장을 알리는 수단이 아니라 상대 당을 공격하는 정쟁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의 한나라당 논평 중 민주당을 겨냥한 논평은 97개(53.3%)였다. 민주당은 정부·여당을 겨냥한 논평이 236개(86.1%)나 됐다. 이 가운데 69건(25.2%)은 이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 단어 빈도수를 보면 274개의 논평에 ‘이명박’이 들어간 단어가 298번 나와 단일명사 중 1위를 차지했다. ‘MB’가 들어간 단어도 13번 나왔다. 또 ‘독재’라는 표현이 23번 등장한다.

민주당의 지난해 12월 8일 논평은 ‘독재자 이명박의 탄생을 알리는’, ‘독재자 이명박은 북한과 다를 바가 없다’, ‘이명박은 국민의 자존심에 총을 쐈다’며 대통령 호칭조차 붙이지 않았다.

한나라당 논평에서는 ‘(정치·억지) 공세’가 60번 등장했다. 막가파·막장이라는 표현도 12번 나왔다. 한나라당 논평도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를 ‘비리·거짓말 정치인’, ‘구제불능’, ‘거짓말의 달인’으로 표현하는 등 독하기는 민주당에 뒤지지 않았다.

방송사 아나운서 출신인 이미영 유어커뮤니케이션컨설팅 원장은 “품위는커녕 어법도 틀린 논평이 많다”며 “올해 1월 6일 민주당 논평의 경우 ‘정말 웃기는 대통령’, ‘봉숭아 학당도 아니고’ 같은 과격·비하 표현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2월 12일 한나라당 논평에서도 ‘희화화시키다(희화화하다)’ 같은 틀린 어법이 사용됐다는 것.

○ 네이밍과 프레임의 정치


한 야당 의원은 논평을 내기 전에 “하루 내내 인터넷에서 눈에 띄는 말, 더 자극적인 말을 찾아 헤맨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다른 의원도 “맹자와 논어를 (논평에) 아무리 인용해도 신문에 한 줄 나지 않았는데, (TV 드라마에 나온) ‘그게 최선입니까’ 한마디를 흉내 내니까 바로 ‘떴다’”고 털어놨다.

여야 할 것 없이 선뜻 이해하기조차 힘든 복잡한 세제와 복지 정책 문제를 한 단어로 네이밍(이름 붙이기)하고 상대방에 낙인(딱지)을 붙여 프레임 속에 가두는 일도 흔하다. 당 지도부가 의원들을 부추기는 경우도 많다. ‘MB악법’, ‘부자감세’, ‘4(死)대강 사업’ ‘부자급식’ ‘공짜 시리즈’ 등 난무하는 조어 속에 진지한 정책경쟁은 실종되고 공허한 ‘이미지 정치’만 확산시키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서강대 이 교수는 “여야가 상대를 선의의 경쟁적인 동반자로 보지 않고 적으로 보는 정치 풍토가 근본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치를 ‘상대방이 불리해야 우리가 유리해지는’ 제로섬 게임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런 대결 구도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극대화해 공멸을 재촉할 수 있다”면서 “최소한 의회 안에서만이라도 절제된 용어를 쓰고 품격 있는 행동을 보일 수 있도록 정치언어의 레드라인(금지선)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 “비방-조롱 싫지만 독해질 수밖에 없는 자리” ▼
‘독설공작소’ 대변인실 변명




“이번 날치기 처리 때 국회에 을사오적(乙巳五賊)에 필적할 만한 병인오적(丙寅五賊)이 등장했다. 병인오적은 국회의 사망을 앞당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치생명을 끊는 것이 국민 앞에 속죄하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하기 바란다.”(지난해 12월 12일 민주당 전현희 원내대변인)

“전 원내대변인의 막가파식 논평은 정치의 금도를 넘어선 저질스러운 언어공해에 지나지 않아 민주당이 과연 이성이 존재하는 정당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이 공당인지 길거리 단체인지 헷갈리게 한다.”(같은 날 한나라당 배은희 대변인)

한나라당이 지난해 12월 8일 새해 예산안을 강행처리한 데 대해 여야 대변인 사이에 주고받은 핑퐁식 공방이다. 이렇듯 대변인실을 통해 생산된 정당들의 논평들은 ‘누가 더 자극적인가’를 경쟁하듯 할 때가 많다.

현재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모두 2명의 대변인과 2명의 원내대변인을 각각 두고 있다. 부대변인단까지 포함하면 20∼30명씩이나 되는 대변인단을 운영하고 있다.

차영 민주당 대변인은 “야당 대변인의 유일한 무기는 말”이라며 “논평 강도가 약하면 일부 당원이 ‘여당 대변인’이냐고 항의하기 때문에 수위를 낮추고 싶어도 뜻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변인들은 당 대표를 대리해 이전투구를 벌이기도 한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2일 “중동의 민주화 물결을 빙자해 북한의 민주주의를 거론한다면 이는 낡은 이념”이라는 민주당 손학규 대표를 겨냥해 “정신상태가 의심스럽다. 헛소리도 이 정도면 중증”이라고 말했다. 차 대변인은 이에 “손 대표 발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은데 오해가 있다면 한 수 가르쳐줄 용의는 있다”고 되받았다.

여야 대변인들도 대변인실이 ‘독설공작소’란 소리를 들을 만큼 정치 갈등을 증폭시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조해진 전 한나라당 대변인은 “야당의 잘못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비방, 폄하, 조롱, 약올리는 것은 못하고, 하기도 싫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험한 말은 무엇보다 ‘독설을 권하는’ 정당구조 탓이라는 것이 대변인들의 대체적인 변명이다.

한국식 대변인제는 외국에서는 유사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의 경우 선거기간에만 한시적으로 대변인을 두고 평상시엔 의원 개인이 독립적으로 언론과 직접 접촉한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는 “미국의 정당들처럼 대변인을 따로 두지 말고 원내대표, 상임위원장 등이 직접 브리핑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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