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김정남 생모 성혜림 묘, 모스크바 외곽에 있다

  • 입력 2009년 7월 28일 02시 50분


본보 첫 확인… 공동묘지 관리인 “2005년경 매장”
관리사무소 사망자 명부엔 가명 ‘오순희’로 등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의 국모(國母)가 될 수도 있었던 여자의 묘 치고는 너무 관리가 되지 않았네요.”

20일 오후 모스크바 서쪽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번째 동거녀인 성혜림(1937년 1월∼2002년 5월)의 묘를 둘러보던 러시아인들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봉분 위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 묘비 위에 떨어진 나뭇가지, 묘소 주변에 수북이 쌓인 낙엽은 누구도 돌보지 않는 무연고 묘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이 묘는 성혜림이 묻힌 곳이 틀림없었다. 묘 앞에는 한글로 ‘성혜림의 묘’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었고, 묘비 뒷면엔 ‘묘주 김정남’이라고 적혀 있었다. 김정남은 김 위원장과 성혜림의 장남이다. 묘지 관리인들에 따르면 그는 2005년경 북한인들을 모스크바에 데려와 묘비를 세웠다.

이에 앞서 기자는 묘지 관리사무소에 들러 사망자 명부를 확인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다. 성혜림의 묘비가 세워진 구역에 묻힌 사망자는 ‘오순희’라는 가명으로 등재된 사실이다. 오순희 명의의 묘를 확인해 보니 바로 그의 묘소였다. 성혜림의 시신은 모스크바에서 가명으로 위장 안치됐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한국 언론으로서는 처음으로 그의 묘지를 확인했다.

성혜림의 시신 행방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 있었다. 북한 당국이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가지고 갔다는 설이 많았다. 화장(火葬)한 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얘기도 돌았다. 시신 행방이 묘연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묘가 등재 단계부터 위장됐기 때문이다.

성혜림 묘비 뒷면엔 ‘묘주 김정남’ 글자 선명
아들 권력다툼서 밀린 올초부터 당 간부들 발길 끊어
“외국인이 왜 러 공동묘지에…”
안장때부터 논란 끊이지않아
北요청으로 명부 위장한듯

트로예쿠롭스코예 묘지 관리인은 성혜림이 러시아 땅에 묻힌 배경을 묻자 “정치적인 문제라서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의 모스크바 매장에 러시아와 북한 당국의 정치적 거래가 얽혀 있음을 시사하는 얘기였다. 한 관리인은 “북한 국적인 그의 시신을 본국으로 보내지 않고 유명 러시아인들이 안장된 묘역으로 밀고 들어온 바람에 묘소 조성 당시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칙적으로 외국 국적의 사망자는 이 묘지에 묻힐 수 없었는데 북한 당국이 러시아에 “성혜림 시신의 본국 송환 계획을 취소하니 북한의 국모 수준으로 안치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성혜림을 가명으로 위장 매장한 기관으로도 북한 대사관이 지목됐다. 한 러시아 공무원도 “사망자 명단은 평양의 지시에 따라 북한 대사관이 조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묘지 관리인에 따르면 사망자 명부를 가명으로 바꾸면 일반 방문객은 가명을 모르면 묘지를 찾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모스크바 시내에는 이 같은 공동묘지가 20곳이 넘는 데다 이 묘역에 묻힌 사망자도 2만 명을 웃돈다.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 관리인들은 “매장된 성혜림의 신원 감추기는 처음부터 외부 방문객의 묘지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그의 묘비엔 사망 날짜가 ‘2002년 5월 18일’로 새겨져 있었다. 당초 알려진 사망 날짜인 5월 17일보다 하루가 늦다. 묘소를 함께 둘러본 러시아인은 “외부인의 접근을 이중으로 막기 위해 사망일자를 조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성혜림의 묘소가 조성된 현장에서도 위장의 흔적을 추가로 엿볼 수 있었다. 그의 묘소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묘소 주변에 있는 러시아인들의 묘비는 모두 서쪽을 향해 있었다. 실제로 러시아인 사망자의 묘는 정면에서 차례로 확인하면서 오른쪽으로 지나가는데 그의 묘비는 반대 방향으로 세워져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구의 묘인지 쉽게 확인하기 어려웠다.

1970년대 말부터 30여 년간 모스크바에 장기 체류했던 성혜림은 모스크바에선 유명인사였다. 공동묘지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러시아인 대부분은 그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묘소에서 20m 떨어진 도로 근처에서 꽃밭을 가꾸던 한 여성 근로자도 “그가 김정일의 첫 번째 동거녀였고 이들의 아들은 김정남”이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러시아인들에 따르면 성혜림이 모스크바에 처음 온 해는 1974년. 김 위원장이 두 번째 여자인 김영숙과 결혼한 뒤였다고 한다. 이에 앞서 성혜림이 김 위원장과의 동거로 김정남을 낳았지만 김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에게 이런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이 쓴 자서전 ‘등나무 집’에는 그의 모스크바 이주 경위가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김 위원장의 동생 김경희는 그에게 “정남이는 내가 키울 테니 (소련으로) 나가라. 노후는 내가 보장하겠다”며 그의 모스크바 이주를 종용했다.

성혜림은 소련으로 건너온 뒤 소련 외교부가 제공한 외교관 전용 건물에서 생활했다. 그가 2002년 5월 17일 사망할 당시 거주했던 곳은 모스크바 남서쪽 바빌로바 거리 85. 이 건물에서 32년 동안 일했던 니나 니콜라예브나 씨는 “성혜림이 낮에는 북한 경호원 2, 3명에게 번갈아 감시당하고 밤에는 신경쇠약 정신병에 따른 불면증으로 수시로 구급차에 실려 갔다”고 말했다. 이 건물에서 20년 동안 살았다는 한 러시아 남자는 “그가 북한 왕조의 대를 이을지도 모르는 왕자를 낳아서인지 몰라도 그의 모스크바 생활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았다”고 전했다.

성혜림의 묘소가 있는 공동묘지 관리인들은 “2008년까지 북한 관리들이 그의 묘소를 주기적으로 관리했지만 김 위원장의 권력이양설이 떠돌았던 올해 초부터는 이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했다.

성혜림의 묘소 오른쪽에는 언제 갖다 놓았는지 알 수 없는 빨간색 조화 한 송이만 남아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의 묘소를 방문하는 북한 고위관리들이 줄을 이었으나 최근에는 발길이 거의 끊겼다는 것. 북한 사정을 잘 안다는 한 러시아 여성은 “그의 묘소가 최근 왕자들의 권력 다툼으로 누구도 돌보지 않는 ‘버림받은 여인의 무덤’으로 추락한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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