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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6월 12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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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과 2008년 6월. 서울 한복판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나와 구호를 외치는 상황이 21년 만에 재연됐다.
하지만 시위를 촉발한 정치 사회적 상황과 시위 참가자들, 구호 등은 판이하다. 대학생과 넥타이 부대가 주도했던 1987년과 달리 올해는 학생부터 주부, 회사원, 노숙인까지 다양한 사람이 몰려 나왔다.
돌이나 부서진 보도블록을 들었던 손에는 종이컵 촛불과 휴대전화가 들려 있다.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던 구호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로 바뀌었다.
○1987년의 시대 상황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그해 1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된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결정적 도화선이었다.
독재정권의 탄압에 저항한 주역은 상아탑의 학생들이었다. 1987년 초 전국의 각 대학에서는 화염병과 최루탄, 쇠파이프와 각목이 난무했다. ‘백골단’으로 상징됐던 진압경찰들은 학교 안까지 들어가 시위 학생들을 잡아갔다. 최루탄 가스가 자욱하던 캠퍼스에는 독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공분이 뿜어낸 엄숙함이 가득했다.
폭력은 이에 맞서는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특히 4월 정부의 ‘호헌’ 발표는 30, 40대 직장인들인 ‘넥타이 부대’를 거리로 끌어냈다. 그해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뒤 다음 날 전국 18개 도시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즉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20일가량 진행된 1987년 6월 민주항쟁에는 전국적으로 50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했다.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33개 시와 4개 군에서 시민들의 대규모 저항이 잇따랐고 수많은 시민과 경찰 부상자가 속출했다.
수많은 사람이 항쟁에 동참한 데는 독재정부의 인권 탄압과 반민주적 행태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었다. 체제에 대한 불만과 공통의 분노가 저항의 동력이 된 셈이다. 또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군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저항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뽑아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열망은 ‘호헌 철폐’ 및 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이어졌다. 시위가 대학가에서 시작됐지만 조직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권 및 시민단체와의 유기적 결합이 한몫했다. 특히 3김 씨(김영삼 김대중 김종필)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은 개헌 투쟁을 주도했다. 야당 정치인들의 지휘로 재야단체들과 대학 총학생회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권위주의 정권의 압제에 지친 많은 국민은 항쟁에 공감했고 박수를 보냈다. 학교와 직장을 뛰쳐나온 이들은 결국 6월 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시국선언을 이끌어 냈다. 당시 정부 여당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부대 동원을 검토했지만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88서울 올림픽을 앞둔 데다 정권 말기의 한계 때문에 결국 직선제 개헌 요구 수용이라는 항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6·29선언 이후 안정을 되찾고 직선제 개헌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도 정치권이 구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2008년 6월, 지금은…
이명박 정부 출범 100일도 안 돼 촉발된 이번 촛불집회는 처음에는 중고교생들이 대거 서울 청계광장에 쏟아져 나와 주목을 끌었다. 21년 전 체제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됐던 ‘가투(거리 투쟁)’와 달리 이번에는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우려가 미국과의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시위의 방아쇠를 당겼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이미 일어난 일이나 상황에 대한 저항이었던 반면 올해 촛불집회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현실(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대한 불안이 동력이 된 것이다.
그러나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은 일리가 있지만 광우병에 대한 우려가 과장됐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넥타이 부대’가 합류했고 대학생과 노조, 야당 정치인들이 합류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번 촛불집회는 특정 주도세력 없이 각계 시민들이 모였다가 제각기 헤어지는 불특정 다수의 새 시위 형태를 보여줬다. 야당 정치인들이 촛불집회에 동참하긴 했지만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오히려 비난을 받기도 했다.
초기의 비폭력 집회는 시간이 지나고 집회 규모가 커지면서 다양한 집단과 이해 계층이 참여함에 따라 ‘이명박 정권 퇴진’ ‘독재 타도’를 외치는 정치집회 성격으로 변하면서 폭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권 퇴진 구호가 등장했으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530만 표의 압도적 표 차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이 실제 업무를 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정권을 내놓아야 할 정도의 실정(失政)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밤늦게까지 춤추고 노래부르며 축제를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일부 시위 참가자는 전경을 폭행하고 경찰 버스를 불태우는 등 폭력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경이 여대생을 군홧발로 밟고 근거리에서 시위대에 물대포를 쏘는 등 강경 진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와 함께 폭력 시위와 무단 도로 점거에 대한 공권력의 무기력한 대응으로 불만도 커지고 있다.
보수 진영에서 촛불시위에 맞서 맞불 집회를 개최하면서 진보-보수 대립으로까지 번진 것도 1987년과는 다른 양상이다.
○촛불이 남긴 것들
아직도 진행 중인 촛불집회는 졸속 쇠고기 협상 등 국정 운영의 난맥으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이명박 정부의 대대적인 국정시스템 및 인적 쇄신을 이끌어 낼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집회 과정에서 ‘진압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허위 사실이 인터넷으로 유포되거나, 한 청소년이 재미로 휴대전화를 통해 ‘휴교 집회 참여’라는 허위 메시지를 대량으로 보내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부르기도 했다. 특히 인터넷이 촛불시위 참가자를 늘렸지만 부정확한 정보의 무차별 확산 등 인터넷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집회 현장에 가봤다는 임성호 경희대 교수는 “비장했던 1987년과 달리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즐기는 표정이었다”며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 놀이하듯 적대감을 표출하며 심리적 쾌감을 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1987년과 2008년 집회가 저항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내용을 봤을 때는 촛불집회는 주부, 초등학생 등 훨씬 넓은 참여가 이뤄졌다”면서 “그러나 1987년에는 대의 민주주의가 살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대의 정치는 거의 죽어버린 상황”이라고 말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참여 민주주의가 구현됐다는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이다. 정당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의사소통이 막힌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자주 있으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