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사 카드로 특검 압박… 대선 한복판 ‘盧風’

  • 입력 2007년 12월 1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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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을 불과 사흘 앞둔 16일 대통령 선거전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노 대통령이 정성진 법무부 장관에게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관련 핵심 의혹으로 꼽히는 이른바 ‘BBK 사건’에 대해 검찰이 재수사하도록 지휘권을 발동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린 사건에 대해 재수사를 지휘하라고 지시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특검법 처리 압박과 검찰 불신=노 대통령이 대선을 목전에 두고 검찰에 재수사를 지시한 것은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켜 대선 판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나라당과의 이면거래설’이 흘러나올 정도로 BBK 수사 결과 발표에 대해 침묵하던 노 대통령이 정치적 초강수를 두고 나선 셈이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가 이날 밤 “한 점의 부끄럼도 없다”며 특검법안을 전격 수용하기로 함에 따라 노 대통령이 생각했던 선거 막판 대선 구도 흔들기는 일단 의도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실질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이번 조처는 노 대통령의 ‘범여권 지원 의도’가 표출된 것이라는 논란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노 대통령은 정 장관에게 “현재 국회에서 특별검사법이 논의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해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가장 실효성 있는 조치를 강구하라”고 주문했다.

‘실효성 있는 조치’에 대해 전해철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지휘권 발동과 특검이라는 양자관계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충분히 검토하라는 것이다. 그 판단은 법무부 장관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의 17일 특검법 처리를 하루 앞두고 반(反)이명박 진영에 ‘반드시 특검법을 통과시키라’는 메시지를 보냄과 동시에 BBK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이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는 분석이다. 특검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대선 막판에 힘을 합치는 과정에서 반이명박 진영이 확실히 구축된다면 마지막 승부수를 띄울 수도 있다는 복안도 가질 법하다.

청와대는 10일 대통합민주신당이 BBK 수사 검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제출했을 때도 차라리 특검을 추진하는 게 낫다는 견해를 보였다.

검찰에 대한 노 대통령의 깊은 불신도 깔려 있다. 특검이든 지휘권 발동을 통한 재수사든 BBK 사건에 대해 ‘원점에서 다시 수사를 하라’는 지시이기 때문이다.

전 수석은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가 있었지만 국민적 의혹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고, 공개된 이명박 후보의 육성 동영상은 그간 국민이 품었던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한 의혹을 더욱 더 확대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각 후보 측 반응=이명박 후보는 이날 대선 후보 합동 TV토론회에서 노 대통령의 재조사 검토 지시와 관련해 “드디어 투표 3일 전에 새로운 공작이 나오는 것 같다”며 “대통령은 공정하게 중립을 지킬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말했다.

반면 정동영 후보 측은 “검찰 수사의 정당성은 상실됐고 검찰 수사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청와대의 지시는 뒤늦은 감이 있다”며 “검찰의 재수사가 아니라 ‘이명박 특검’을 통한 전면 재수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회창 후보 측 중앙선대위 류근찬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이명박 특검법안’이 국회에서 처리되고 특검에 의한 철저한 재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촬영 : 이종승 기자


촬영 : 김동주 기자


촬영 : 신원건 기자

▼鄭법무 ‘검찰 수사결과 신뢰’ 이미 밝혀

검찰 안팎 “대통령 지시 앞뒤 맞지않아”▼

■ 지휘권 검토 지시 타당한가

노무현 대통령이 16일 정성진 법무부 장관에게 ‘BBK 주가조작 사건’ 재수사를 위해 지휘권 발동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데 이어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특검법 수용 의사를 밝히자 법무부와 검찰은 하루 종일 술렁거렸다.

법무부와 검찰 주변에선 17일 국회에서 특검법 통과가 확실시됨에 따라 정 장관이 수사 지휘권을 발동할 필요는 사실상 없어졌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특검이 도입되면 이번 사건을 재수사하는 수순을 밟게 되기 때문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장관의 재수사 지휘권 발동은 피했지만 정치권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관계자는 “재수사든 특검이든 100번씩 해 보라. 수사 결과가 바뀌는지…”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노 대통령이 정 장관에게 지휘권 발동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자 법무부는 16일 오후 7시부터 약 2시간 30분 동안 정 장관 주재로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지휘권을 발동하거나 △지휘권 발동을 거부하되 특별검사제를 수용 △검찰이 자체적으로 재수사에 착수하는 방안 등이 다양하게 논의됐다.

법무부 관계자는 “각 방안의 장단점을 놓고 격론이 오갔다”며 “검찰의 명운이 걸린 만큼 일선 검사들의 의견을 추가로 듣기 위해 17일 오전 한 차례 더 회의를 열어 결론을 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법무부 관계자도 “하루 정도 더 시간을 갖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BBK 동영상이 공개되자 서울중앙지검 김홍일 3차장은 휴일인 16일 두 차례나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그는 “재수사할 계획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두 번째 간담회 도중 노 대통령의 지시내용이 전해지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배석했던 서울중앙지검 최재경 특수1부장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라며 곤혹스러워했다.

재경지검의 중견 간부는 “봉변을 당한 느낌이다. 대통령이 특정 정치권을 지원해 주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검 찰 “재수사든 특검이든 결과 바뀌나 백번 해보라”

법무부 “냉정히 생각해야” 2시간 반 격론 끝 결론 미뤄▼

노무현 대통령이 16일 정성진 법무부 장관에게 ‘BBK 주가조작 사건’ 재수사를 위한 지휘권 발동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을 둘러싸고 검찰 주변에선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이번 사건 수사 결과를 놓고 정 장관과 검찰은 같은 의견을 보였다. 뒤늦게 정 장관이 지휘권을 발동해 임채진 검찰총장에게 재수사를 지시하기 어려워진 이유다. 검찰청법엔 구체적 사건에 대해선 대통령이 아니라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만을 지휘 감독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정 장관은 10일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최고 엘리트 검사들이 밤을 새우고 휴일을 반납하며 수사한 결과를 믿지 않고 몇백억 원을 횡령한 사람의 말에만 의존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검찰의 손을 들었다. 11일에도 BBK 사건 검찰 수사팀에 대한 직무 감찰권 행사 여부에 “검찰을 신뢰한다”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런 상황은 2005년 10월의 첫 수사지휘권 발동 당시와 다르다. 천정배 당시 법무부 장관은 강정구 교수에 대해 구속 수사의 필요성을 제기한 검찰을 향해 불구속 수사를 하라며 김종빈 전 검찰총장에게 지휘권을 발동한 것. 당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의견이 정면충돌한 것이다.

검찰 주변에서 노 대통령의 수사지휘권 검토 지시가 검찰에 대한 압박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한 것도 이 같은 기류와 무관치 않다.

검찰 고위 간부들도 “사실상 즉각적인 지휘권 발동을 지시한 것 아니냐”며 노 대통령의 지시에 대해 유례없이 강하게 반발했다.

법조계 주변에선 통상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고소 고발인은 항고 재항고를 할 수 있는데도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수사지휘권 검토를 지시한 것도 “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항고를 하면 사실상 재수사의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2005년 10월 천 전 장관은 김 전 총장에게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1949년 당시 이인 법무부 장관은 최대교 서울지검장에게 이모 장관을 기소하지 말라고 ‘구두’ 지휘한 적이 있다.

2003년 강금실 법무부 장관은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 사건과 관련해 지휘권 발동을 검토한 적이 있다. 그러나 “검찰 의견을 존중한다”며 지휘권을 발동하지 않았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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