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 동아일보
  • 입력 2007년 10월 25일 03시 03분



국정원 과거사위 최종조사 결과 “DJ납치, 박 前대통령 지시-묵인 가능성”
《1973년 8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발생한 ‘김대중(DJ) 납치사건’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거나 최소한 묵인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 나왔다. 하지만 1987년 11월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기획했거나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는 24일 이런 내용을 담은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2004년 11월 출범한 과거사위는 이날 조사결과 발표를 끝으로 △DJ 납치사건 △KAL 858기 폭파사건 △인민혁명당(인혁당) 및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 △동백림 간첩단 사건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 △부일장학회 강제 헌납 및 경향신문 강제매각 사건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등 7대 의혹 사건 조사를 마무리하고 활동을 마감했다.
박근혜 前대표 별반응 없어… 日 “주권침해 유감”
KAL기 폭파 ‘北공작원이 저지른 사건’만 확인



▽발표 내용=과거사위는 박 전 대통령이 DJ 납치사건을 지시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직접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관련자들의 증언과 정황 등을 종합해 보면 박 전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과거사위는 △박 전 대통령이 사건 직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은 점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를 일본으로 보내 사건을 수습하도록 한 점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이 이철희 정보차장보의 반대에 부닥치자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며 역정을 낸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과거사위는 당시 중정이 DJ 납치 계획을 담은 ‘KT공작계획서’가 작성된 사실을 확인해 이 사건을 중정이 주도했음을 밝혀냈다.
과거사위는 “일본 정부가 당시 한국 공권력의 개입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도 한국의 요구에 따라 외교적으로 사건을 끝내는데 협조했다”며 “한일 양국 모두 사건 진상 은폐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을 저지른 김현희 씨가 1987년 12월 바레인 공항에서 붙잡혀 김포공항으로 압송돼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을 저지른 김현희 씨가 1987년 12월 바레인 공항에서 붙잡혀 김포공항으로 압송돼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그러나 과거사위는 KAL 858기 폭파사건의 경우 주범으로 지목된 김현희 씨에게 10여 차례 면담을 요청했지만 김 씨의 거부로 조사를 못해 안기부의 개입 여부나 김 씨의 행적, 이 사건의 정치적 이용 여부 등 의혹을 풀지 못한 채 ‘북한 공작원이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만 확인한 채 조사를 끝냈다고 밝혔다.
▽관련자들 반응=DJ측 최경환 공보비서관은 과거사위 발표에 대해 “앞으로 진실이 완전히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고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 비서관은 이날 논평에서 “과거사위가 성의를 갖고 진상규명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것은 평가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범행지시나 살해 목적 등을 인정할만한 사실을 밝혀내고서도 그 결론에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이날 과거사위 발표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 측근이 전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주변 인사들은 “추측에 따른 역사왜곡”이라며 반발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면서도 “(과거사위) 발표 내용 하나하나에 청와대가 지금 논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DJ 납치사건은 한국이 일본 국내에서 공권력을 행사해 주권을 침해한 매우 유감스러운 사건”이라며 한국 정부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7대 의혹’ 속시원히 못밝혀… 3년간 잇단 정치 논란

과거사위는 한국 현대사의 불행한 과거 청산을 목표로 했지만 실체적 진실을 속 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과거사위가 조사 대상으로 삼은 7대 의혹 사건이 대부분 수십 년 전 사건이어서 관련자가 이미 죽은 경우가 많았고, 관련 기록들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폐기돼 처음부터 실체를 밝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과거사위는 수사권이 없어 KAL 858기 폭파사건의 폭파범으로 지목된 김현희 씨처럼 관련자가 조사를 거부하면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김형욱 씨 사건에서도 관련자들이 시체 유기 장소를 명확히 진술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논란도 많았다. 과거사위가 다뤘던 사건 대부분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당시 유력 대권주자였던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를 겨냥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 동영상 촬영 : 김동주 기자

과거사위 위원에 친여 성향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고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오충일(목사) ‘6월 사랑방’ 대표가 8월 대통합민주신당 대표로 자리를 옮긴 것도 논란이 됐다.
한편 국방부와 경찰청 과거사위도 연말까지 활동을 마감한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12·12쿠데타 및 5·17 확대계엄 △5·18 민주화 운동 △실미도 사건 등 조사 대상 8건 가운데 6건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10·27 법난사건과 재일동포 및 일본 관련 조작간첩 의혹 사건만 남겨둔 상태다.
경찰청 과거사위도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깃발사건(1984년)과 청주대 자주대오사건(1991년) 등 13건 가운데 10건의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으며 연말까지 민간인 사찰과 용공조작사건 등 나머지 사건의 조사와 발표를 마칠 예정이다.
이 밖에 2010년 4월까지 조사활동을 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 등 10여 개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2∼4년 시한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상록 기자 myzodan@donga.com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 7대 의혹사건
사건(발생 시기) 과거사위 결론
김대중 납치 사건(1973년 8월)-박정희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 또는 묵인 가능성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1987년 11월)-북한이 자행한 사건. 안기부 기획 조작이나 사전 인지는 근거 없음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1974년 4월)-박 전 대통령이 개입해 사건 실체가 과장된 사건 관련자 확정 판결 즉시 사형 집행에 박 전 대통령 개입
동백림 사건(1967년 7월)-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확대 과장
김형욱 실종 사건(1979년 10월)-중앙정보부가 납치해 살해. 박 전 대통령 지시 여부는 확인 못함
부일장학회 헌납(1962년 5월) 및 경향신문 매각 사건(1965년 4월) -박 전 대통령이 언론 장악 의도를 갖고 실행한 사건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1992년 10월)-간첩단과 정치인 관련설 등 미확인 첩보를 공개해 대선에 정략적으로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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