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 신년연설 “민생 위기 넘겼다”…국민정서와 차이

  • 입력 2007년 1월 24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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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3일 오후 10시부터 1시간 동안 서울 종로구 세종로 청와대 영빈관에서 집권 4년의 공과에 대해 대국민 연설회를 가졌다. 노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TV 방송으로 생중계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대통령이 23일 오후 10시부터 1시간 동안 서울 종로구 세종로 청와대 영빈관에서 집권 4년의 공과에 대해 대국민 연설회를 가졌다. 노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TV 방송으로 생중계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대통령은 23일 신년연설의 절반 이상을 지난 4년간 자신의 ‘경제 실적’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민생의 어려움은 인정하면서도 이에 대한 책임은 대부분 전 정부와 언론, 야당의 탓으로 돌려 국민의 일반적인 인식이나 정서와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 성장 없는 분배 가능할까

그는 이날 성장 우선론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이에 대해 많은 경제 전문가는 성장이 우선하지 않은 분배는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소득분배 정도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지표인 한국의 지니계수(0∼1의 값으로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는 고도성장이 이뤄진 뒤 그 과실(果實)이 근로자 등 중하위 계층으로 고루 퍼져 나갔던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개선돼 0.28까지 낮아졌다.

반면 요란하게 ‘분배론’을 외친 현 정부 들어서는 2004년과 2005년 연속 0.31을 나타내며 그다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노 대통령이 줄줄이 열거한 복지 분야 예산 확대와 관련해서도 비판이 적지 않다.

김종석(경영학) 홍익대 교수는 “제대로 복지를 하려면 우리 사회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정부 예산 증가분만큼 혜택을 체감하고 있는지 현장에서 먼저 점검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이 ‘작은 정부론’을 철저히 공박하며 ‘효율적 정부’를 내세운 것도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다.

단적인 예로 세계경제포럼(WEF)이 내놓은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은 2005년 19위에서 지난해 24위로 밀렸다. 공공부문 제도 효율성이 47위로 9계단이나 미끄러졌기 때문이었다.

○ 저성장이 불러온 양극화는 간과

노 대통령이 민생고의 원인인 양극화가 세계화, 정보화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 것은 나름대로 정확한 분석이다.

그러나 현 정부 아래서 진행된 저(低)성장이 양극화를 더 부추겼다는 점은 간과했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강석훈(경제학) 성신여대 교수는 “1979∼2005년 소득증가율과 경제성장률의 상관계수를 계산해 보니 최하위 10%가 0.657로 가장 높았고 최상위 10%는 0.278로 가장 낮았다”고 설명했다.

고소득층은 경기를 잘 타지 않는 반면 하위층이 불황의 피해를 가장 많이 봤다는 것이다. 결국 성장률을 떨어뜨린 노무현 정부야말로 양극화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셈이다.

대통령이 “경제가 발전할수록 인건비가 올라가고 기업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자리를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린다”고 말한 것은 과도한 단순화라는 지적이 많다.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산업 발전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산업구조 변화의 결과를 ‘승자’와 ‘패자’로 가르는 흑백논리라는 분석이다.

○ 체감경기 개선 안 돼

현 정부 중반기를 넘기면서 신용카드 남발에 따른 개인의 신용 위기 등 이전 정부에서 유발된 경제 위기의 불씨가 상당 부분 진정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생 체감 경기는 아직 나아질 조짐을 보이지 않고 국내외 투자 환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소비자 기대지수(6개월 뒤 생활형편에 대한 기대를 보여 주는 지수)는 93.7로 2005년 1월(92.5) 이후 1년 11개월 만에 가장 낮았다.

지난해 정부는 일자리 40만 개 창출을 약속했지만 취업자는 29만5000명 늘어나는 데 그쳤고 올해에도 일자리 30만 개를 늘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집값을 잡기 위해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지나치게 강화해 서민과 영세사업자의 대출 길이 막힌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송진흡 기자 jinhup@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부동산 - “(부동산을) 왜 한번에 못 잡았냐.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니깐 절반밖에 못하고, 절반밖에 못하니까 효과 없다고 흔드니까 아무도 안 믿고 또 집 사고…. 결국 ‘부동산 신문’들이 흔들지 않았으면 더 강력한 정책이 안 나왔을 텐데 스스로 손발 묶어 버리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수요억제 치중… 대책 발표만 40여건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는 일부 실패를 자인하면서도 집값을 잡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정책 실패의 근본 원인은 역시 언론 탓으로 돌렸다.

노무현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정책은 굵직한 것만 10여 건, 다 합치면 40여 건에 이른다. 그러나 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많은 언론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수요 억제에 치중한 것이었다.

실제로 서울에서 새로 공급된 아파트는 현 정부 출범 직전인 2002년 15만9767채에서 지난해에는 2만8283채로 82% 줄었다.

대통령은 공공부문에서 공급을 늘려 왔다고 했지만 정부 계획대로 2012년까지 국민임대주택 100만 채를 분양해도 입주까지 2017년은 돼야 한다.

그는 또 “노태우 정부에서는 주택가격이 43% 올랐고, 참여정부는 19% 올랐는데 실감이 안 나죠?”라며 집값이 많이 오르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서울의 집값만 보면 노 전 대통령 때는 39.4%, 현 정부에서는 33.7% 상승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FTA - “개방을 반대하고는 한국이 세계 역사의 대세를 갈 수도 없거니와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한국의 주류가 돼서 한국사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싶다면 개방 문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진보세력은 이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절대로 주류가 되지 못합니다.”

“반미면 어떠냐” 인식 통상에선 바뀌어

통상 전문가들은 “반미(反美)면 어떠냐”고 했던 노 대통령의 대미(對美) 인식이 자유무역협정(FTA)에 관한 한 확실히 바뀐 것 같다며 비교적 높게 평가했다.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는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70%를 넘어선 만큼 개방 문제는 국가경제 전략으로 활용해야 한다”며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그간 한미 FTA 추진을 둘러싸고 제기됐던 각종 음모론을 불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이 지난해 초 한미 FTA를 밀어붙일 때만 해도 진정성을 의심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이 외교 안보 등 다른 문제에서는 동맹관계 훼손 우려가 제기될 정도로 반미, 또는 탈미(脫美)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좌우 양쪽 진영으로부터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고 있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FTA로 피해가 불가피한 농업에 119조 원을 투입하겠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농업과 농민, 농촌을 고려한 좀 더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기업환경 - “경제의 핵심은 기업의 경쟁력입니다. 경쟁의 마당에서 뛰는 선수는 기업입니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노사관계가안정되어야 합니다. 관료적 규제를 철폐하거나 완화하고, 장기적인 인적자원의 공급 확대가 이뤄져야 합니다.”

투자 규제 여전… 노사분규 질적 악화

재계와 민간 전문가들은 노 대통령이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대해 일단 “환영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번 신년연설이 우리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당면 과제와 정책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한다”며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면 기업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논평했다.

하지만 노사관계나 규제완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하이닉스반도체 이천공장 증설 불허에서 보듯 수도권 규제 등 각종 규제가 여전히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며 “연초부터 현대자동차 노조 사태가 일어나 노사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시각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재계는 노 대통령이 사전 배포한 원고에서 “공정거래위원회의 역할이 너무 커진다고 불만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 데 대해서도 대기업 규제가 더 강화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신치영 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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