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남성욱]‘체제경쟁 폐기’ 北이 먼저 할 일

  • 입력 2005년 1월 5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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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이 격렬하게 체제 경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체제 경쟁은 역설적으로 서로를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북측이 평양에 화려한 지하철을 건설하자 남측은 1975년 서둘러 서울지하철 1호선을 개통했다. 북측이 인민대의사당을 건설하자 남측은 북측보다 번듯한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지었다. 북측이 무상 교육, 무상 치료를 선전하자 남측은 초중등 의무교육, 의료보험제를 당초 계획보다 앞서 실시했다.

당시에는 북한 소식을 전하면 간첩으로 오인받던 시절이라 국민은 그저 대통령이 국가 건설에 매진하는 것으로 판단했지 체제 경쟁의 숨은 뜻은 잘 인식하지 못했다. 냉전체제 하의 남북한 지도자들인 박정희와 김일성은 한반도에서 누가 더 잘사는 체제를 건설하는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초반에는 김일성의 우세였다. 분단 당시 일제의 공업지구가 들어선 북측을 접수한 김일성은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으로 제대로 된 공장 하나 없던 남측의 이승만을 물리치고 박정희 마저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서독 분단 당시 서독이 서쪽 공업지구를 차지하고 동독이 농업지구를 차지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남북한 경제력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수출지향적 경제개발전략을 추진한 남한은 고립과 자력갱생 전략에 의존한 북한을 1984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추월했다. 1990년 중반에는 경제력 격차가 열 배를 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체제 경쟁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북측이 핵개발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우리 식대로 살자’를 고집함으로써 남측과의 체제 경쟁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북한과의 체제 경쟁은 이미 폐기됐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체제 각 분야에서 화해 협력의 확대와 경제개혁의 연착륙을 언급했다. 그는 대북정책 책임자로서 반년 이상 답보 상태에 처한 남북관계를 타개하기 위해 ‘북한 달래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남북장관급회담도 재개해야 하고, 특히 북한이 금년에는 북핵 회담에 나와야 하는 절박한 상황인데도 주무장관으로서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한 것은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한국 미국 일본 3국이 공조해서 북을 흔들어 정권 교체를 추진할지도 모른다는 북한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조치가 바로 ‘체제 경쟁 폐기’ 선언인 셈이다.

국민소득에서 25 대 1의 격차가 나는 상황에서 남북한의 체제 경쟁은 어불성설이다. 과거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미국과 체제 경쟁을 벌이다가 소련은 국가경제가 거덜났다. 먹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정권과 체제 경쟁을 논하는 것은 동족으로서 매우 고통스럽다. 동절기 추위를 견딜 수 있게 북한에 연탄도 주고 춘궁기에는 식량도 지원할 수 있다. 문제는 북한이 체제 경쟁이 막을 내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체제 경쟁 종식을 실행하는 최종 결단은 당사자인 북한이 내려야 하며, 북한이 남한의 선의를 인정할 경우 흡수통일의 우려는 사라지고 연착륙에 따른 획기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체제 경쟁 폐기 인정이 선행되지 않는 한 우리가 북한을 안심시켜 협상의 테이블로 유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북한은 정 장관의 발언을 장기간 남북관계가 답보되고 있는 데 대한 초조감의 발로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대하는 ‘자발적 체제 변형 모델’은 평양의 내재적인 변화 없이는 성취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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