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규명… 국보법 폐지… 盧대통령 잇단 ‘이념공세’

  • 입력 2004년 9월 13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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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진상규명, 좌파 계열 독립운동가 발굴, 국가보안법 폐지….’

4·15총선에서 승리하고 탄핵의 고비를 넘어선 뒤 집권 2기를 맞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7월 이후 이념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정면 돌파에 나서고 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의 한 ‘실세’는 최근 지인들에게 “노 대통령이 정말 부럽다. 우리는 여론 눈치, 언론 눈치, 야당 눈치 보느라 제대로 못한 일이 많았는데 노 대통령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실제 노 대통령은 자신이 선정한 의제가 여론의 호응을 별로 얻지 못하고 있는데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상식을 뛰어넘는 ‘정치적 복선’이 깔려있다거나, 반대로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순수한 소신’에 따른 것이라는 등 갖가지 추측이 만발하고 있다.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다’=노 대통령은 2006년 6월 지방선거 때까지 2년간은 전국 단위의 선거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 선거 결과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정치적 부담에서 자유로운 상황이란 얘기다. 노 대통령이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민감한 카드를 빼든 것에는 이런 정치적 환경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한 측근인사는 “노 대통령이 ‘지금이 아니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앞으로 교육개혁 등 몇 가지 민감한 현안을 더 짚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여론에 구애받지 않고 개혁을 추진할 적기라고 보고 있다는 얘기다.

당장의 정치적 득실로만 따지면 노 대통령은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노 대통령도 이를 모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노 대통령은 5일 MBC 특별대담에서 “언제나 사회는 서로 생각을 달리하고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서로 갈등하게 돼 있다. 불신을 만들게 돼 있다. 차제에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일축했다.

▽주류세력 교체는 여전히 진행 중=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대선 승리 1주년 기념행사에서 “시민혁명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대선 승리가 상징하는 ‘주류 교체, 기득권 해체작업’은 멈추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노 대통령의 의중에 밝은 한 고위인사는 노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 주장에 대해 “노 대통령이 평소 소신을 가감없이 밝힌 것이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그 소신을 드러나게 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는 정치권에서 국보법 개폐 문제가 거론됐으나 가급적 언급을 피해 왔었다. 그런 와중에 나온 대법원의 판결이 오히려 노 대통령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법원이 법의 존치 문제까지 거론한 것은 판결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며 “내년에 여러 대법관의 임기가 끝날 예정인데, 노 대통령이 보다 적극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대법원이 자충수를 둔 것이다”라고도 했다. 내년에 대법원장을 포함해 모두 6명의 대법관 교체가 예정돼 있는데, 기존의 관행과 달리 재야 법조계의 진보적 인사를 대법관에 파격적으로 기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 역시 이른바 3∼6공화국 정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산업화 세력’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존 주류세력의 기반을 붕괴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지지층에 눈높이를 맞춰라=노 대통령의 최근 개혁공세는 철저하게 자신의 지지계층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20, 30대의 젊은 층과 진보적 성향의 재야 시민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행보라는 것이다.

반대자를 포용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 노 대통령은 최근 “무조건 포용하라는 것은 잘못된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라고 일축한 적이 있다.

한 측근은 “국보법 폐지의 경우 반대 여론이 더 많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미래의 세대에 투자해야 한다”며 “한나라당이 국보법 문제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나선 것은 20, 30대에게 수구적인 이미지만 더욱 분명하게 각인시켰다”고 평가했다. 노 대통령의 지지도는 30%대에 머물고 있지만, 미래 세대에 대한 투자라는 관점에서는 결국 득을 볼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셈법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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