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 친일규명法 개정안 문제점]‘의도적 여론몰이’ 길튼 셈

  • 입력 2004년 9월 10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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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인터넷상에는 특정인들의 친일행적에 관해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얘기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다. 거의 죽은 사람들 얘기다. 정확히는 현재 살아 있는 유력 인사들의 아버지 얘기가 대부분이다. 대대적인 명예훼손 위험이 방치되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친일진상규명법(약칭)이 발효돼 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하면 그러한 얘기들이 공론의 장으로 나올 것이다. 그래서 위험은 더욱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예방장치마저 없앤 여당 개정안=기존법은 허위진술이나 허위자료 제출시 10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했으나, 열린우리당이 국회에 상정한 개정안엔 이 조항이 빠졌다. 악의적인 명예훼손에 대한 최소한의 예방장치마저 사라진 것이다. 개정안은 또 기존법의 ‘업무상비밀누설 금지규정’을 삭제하고 대신 ‘기밀준수 의무규정’을 두는 데 그쳤다.

이것이 개정안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이유 중 하나다. 개정안대로라면 조사과정에서 누군가 불순한 목적으로 거짓진술을 하고 거짓자료를 내도, 그리고 위원회가 기밀로 분류하지 않는 한 그 내용이 외부에 유포되더라도 즉각적인 제재수단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근거가 박약한 여론몰이는 아주 용이해졌고, 조사대상자들의 명예훼손 우려는 그만큼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데=광복 직전 20세의 나이로 친일을 했다고 해도 지금은 79세다. 조사대상자 대부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조사대상자의 진술과 해명을 직접 듣지 못한 채 참고인의 어설픈 증언이나 불충분한 사료만을 근거로 조사와 판정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 ‘말이 없는’ 사자(死者)에 대한 일방적인 명예훼손은 반증이 쉽지 않고, 유족이나 자손이 없으면 아예 문제조차 안 될 수 있어 법적 억제력이 약하다. 친일문제처럼 논란이 많은 사안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어 광범위한 명예훼손의 위험이 한층 크다. 개정안은 조사대상자가 사망한 경우 그 배우자나 직계자손이 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했으나 이 같은 사후조치가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유족과 자손의 명예는 어찌 되나=위원회가 조사대상자로 분류한 사람들의 유족과 자손의 명예도 문제다. 조사대상자 중에 조사결과 친일반민족행위자 판정을 받지 않을 사람들도 적지 않겠지만, 조사대상자에 포함된 사실만으로 유족과 자손은 엄청난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법원 판례는 유족이나 자손을 명예훼손의 피해자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누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리켜 ‘민족반역자’라며 명예를 훼손한 경우 아들이 자신의 명예훼손을 주장할 수는 없고, 아버지를 대신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경우 유족이나 자손은 명예가 아니라 주관적 명예감정을 침해당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격권 침해와 공익성 논란=허영(許營) 명지대 석좌교수는 “부당한 명예감정의 침해가 형법상의 명예훼손은 아니어도 헌법이 보장하는 인격권 침해는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법무부 민법개정 특별분과위원회가 최근 확정한 민법개정안은 인격권 보호조항을 처음으로 명문화했다. 인격을 재산 못지않게 보호받아야 할 중요한 가치로 공식화한 것이다.

인격권 침해 시비를 벗어나려면 공익성과 진실성이라는 두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하나, 개정안의 경우 우선 정치적 의도 때문에 공익성에 대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중견 판사는 “친일진상규명법은 인격권 보호를 강화하는 추세와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고소나 손해배상 소송의 한계=물론 조사대상자의 유족이나 자손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하거나 손해배상 소송을 내는 방법도 있다.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죄는 친고죄이기 때문에 고인의 8촌 이내 혈족이나 직계자손들만 고소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소나 손해배상 소송으로 훼손된 명예가 회복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 판사는 “60년 이상 지난 일들을 일일이 따져 진위를 가리기는 매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명예훼손사건은 다툼이 치열해 최종판결이 나올 때까지 1, 2년은 족히 걸린다.

조사대상자 중 사망한 사람에 대한 명예훼손 관련 법조항 비교
열린우리당 개정안(국회 행자위 상정)사안한나라당 개정안
관련조항 없음허위 진술 및
허위자료
제출
―조사대상자를 모해할 목적으로 허위진술을 한 참고인이나 허위자료를 제출한 자는 10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진상규명위 조사결과에 대한 이의신청은 60일 이내 서면으로 신청
―진상규명위는 이의신청을 받은 날부터 60일 이내 조치사항 서면 통지
후손의
이의 제기
―진상규명위 조사결과에 대한 이의 신청은 60일 이내 서면으로 신청
―진상규명위는 이의신청을 받은 날부터 30일 이내 결과 서면 통지
―진상규명위가 의결절차 거쳐 공개한 보고서나 조사내용과 관련해 진상규명위 관계자가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없는 한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위원회의 기밀준수 의무 지키지 않았을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
진상규명위
관계자의
책임
―업무상 취득한 비밀을 누설했을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
관련조항 없음조사내용
언론공표
금지
―진상규명위 활동을 국회 등에 보고하고 사료를 편찬하기 전 신문 잡지 방송(인터넷 신문 방송 포함)과 그 밖의 출판물을 통한 조사내용 공개 금지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조수진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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