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씨 “운명개척 인간중심 철학이 내 話頭”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6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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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교수는 “평화통일이 대원칙이지만, 평화를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북한인민들의 자주권을 놓고 독재자와 흥정하는 것은 북한 인민의 권리를 침탈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장엽 교수는 “평화통일이 대원칙이지만, 평화를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북한인민들의 자주권을 놓고 독재자와 흥정하는 것은 북한 인민의 권리를 침탈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새해에도 전쟁과 테러의 위협은 끊이지 않고 세계화의 물결은 점점 더 거세질 전망이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사회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극복하고 평화 통일을 이뤄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전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로 1997년 남한에 망명한 황장엽씨(81·명지대 및 전주대 석좌교수)를 지난해 12월 24일 서울 모처에서 만나 민주주의를 위한 철학과 한반도 문제의 해법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

―황 교수께서는 1950년대부터 40여년간 북한에서 국가 운영의 기초가 되는 철학을 만드시고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셨습니다. 1997년 망명 후에도 연구를 계속해 최근에는 ‘인간중심철학’ 3부작과 ‘인간중심철학의 몇 가지 문제’ 개정판을 내놓으셨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왜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본래 모든 인식은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과 관련돼 있습니다. 철학적 인식도 인간의 운명 개척에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아무 희망도 없던 일제강점기에 ‘사람이 왜 사는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운명 개척이라는 실천적 목적과 떨어져 논의할 경우 철학은 공리공론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철학을 ‘인간 운명 개척의 길을 밝히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는 철학사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황 교수께서 초기의 이론화 작업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셨던 북한의 ‘주체사상’이나 그 기반이 된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중심철학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입니까.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해방을 통해 나름대로 인간 운명 개척의 길을 밝혀주는 사상이지요. 하지만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을 계급투쟁과정으로 보고 사회적 운동의 주체를 인류의 한 부분일 뿐인 계급으로 인정했다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그런데 스탈린주의자였던 김일성은 노동계급을 공산당이 대표하고 공산당을 수령이 대표한다는 논리로 계급적 집단주의에 기초한 수령독재를 강조했습니다. 김정일은 ‘수령’ 개인을 더욱 절대화하면서 아예 개인주의에 기초한 수령독재로 나가게 됐고요. 저는 변질돼 가는 주체사상을 보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계급투쟁이나 프롤레타리아독재가 바른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수령이 아니라 인민을 기준으로 해서 사회발전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황 교수께서는 ‘인간중심철학’에서 사회진보의 기준으로 민주주의의 확대를 강조하셨고, 그 민주주의는 개인중심적 민주주의와 집단중심적 민주주의를 변증법적으로 통일한 것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이런 관점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때로 극렬하게 부딪치는 현재의 한국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개인의 생존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현재의 역사발전 단계에서는 개인주의적 민주주의가 실정에 맞습니다. 그런 점에서 계급독재나 개인독재로 후퇴한 사회주의보다는 개인주의적 민주주의를 확대해 온 자본주의가 현시점에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역사의 발전은 ‘민주주의’의 확대를 기준으로 봐야 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혁명과 투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협조로 이뤄집니다. 개인중심적 민주주의와 집단중심적 민주주의의 변증법적 통일을 지향하는 인간중심철학의 민주주의는 남북한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중심철학이 ‘진보의 철학’을 표방하고 있지만 남한사회의 이른바 ‘진보’ 진영 지식인과 철학자들은 인간중심철학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또 과거 남한의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사람들까지 가까이하시는 황 교수의 행보를 보면서 ‘수구반동’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 책도 제대로 읽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도 않고 설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남한에서 과거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가에 대한 판단은 역사가에게 맡길 일입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주체사상을 만들 때 수령독재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독재와 결별하기 전까지는 제게도 잘못이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반성하고 이렇게 변화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이루는 길이 어떤 길인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인 김정일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지요. 김정일 정권을 타도한 다음에 어떻게 하겠느냐고 한다면 그건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통일된 조국을 어떻게 끌고 갈까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면 제가 누구보다도 더 진보적일 겁니다. 현재 무엇에 반대해서 투쟁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남북통일의 원칙과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황 교수의 철학에 입각한다면 현재 북핵과 같은 미묘한 문제에서 어떤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통일의 기본원칙은 전쟁을 피하고 평화적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평화가 아무리 귀중해도 평화를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시킬 수는 없지요. 적과 우리 편을 나누고 선과 악을 가르는 데는 언제나 민주주의 원칙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핵무기 개발계획을 포기하면 김정일 독재체제 유지를 인정해 주겠다는 일부 인사들의 주장은 절대적으로 존중해야 할 인민의 자주권을 놓고 독재자들과 흥정하는 비민주적 태도입니다. 독재체제를 제거하고 민주주의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북한 인민의 권리에 속하는 문제이지 외부 사람들이 독재자들과 흥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평화적 방법으로 국내외 민주적 역량을 총단결시키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미일 공조체제를 강화해야 합니다. 중국이 북한독재집단과 동맹관계를 계속한다는 것이 중국 인민의 수치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중국의 근본 이익에도 배치된다는 점을 강조해서 중국도 북한 민주화에 적극 동참하도록 해야 합니다.

김정일 체제 내에서 경제개혁을 유도해 그 체제를 평화적으로 붕괴시키고, 남북연방제를 거치며 남북간 격차를 줄인 후, 마지막 단계로 남북간 군사분계선을 철폐하고 단일정부를 수립한다면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6년여 동안 남한의 정치상황도 관심 있게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중심철학의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해서 남한의 정치를 보신다면….

“충분히 연구를 못 했기 때문에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세 가지는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정치활동자금을 모두 국가가 부담하도록 선거제도를 개선해야 합니다. 둘째, 여당과 야당을 가르지 말고 각 정당이 활동을 하다가 선거에서 뽑힌 사람들이 각 정당의 비율에 따라서 정권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 김정일 같은 독재자와도 야합을 하게 됩니다. 셋째로 삼권분립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국내 행정(치안)은 경찰이면 족하므로 국방은 입법부에 귀속시키고 사법부의 재판권과 검찰권을 완전히 독립시켜야 합니다. 국회는 내각책임제에 따라 최고 주권기관이 되고 대통령은 국가의 수반으로 대외적 상징이 되면 됩니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인터뷰 뒷얘기▼

2시간여의 인터뷰 내내 황장엽 교수는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생각의 속도와 입 밖으로 말이 나오는 속도가 같아 보일 만큼 논리적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 인간중심철학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이나 남북통일 문제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견해를 밝혔지만,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나 2003년 10월 말 처음 방문했던 미국에 대한 인상을 묻자 “이야기할 입장이 아니다”라며 말을 접었다. 할 말과 안 할 말을 분명히 가리는 냉철한 모습이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신념을 감춰야 했던 부끄러운 과거도 솔직히 털어놓았다.

“1960년대 말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잘못됐다고 판단한 후에도 노동당을 떠날 용기는 내지 못했어요. 그래도 북한 사회의 교과서가 되는 김일성의 연설문에서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걸러내느라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는 ‘인간중심철학’에 대해 할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며 나중에 다시 만나 못 다한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했다.

▼황장엽씨는…▼

△1923년 평남 강동군 출생

△41년 평양상업학교 졸업, 일본 주오(中央)대 유학

△48년 중앙당학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공부. 김일성종합대 예비과 교수 겸 철학연구원(대학원생)으로 철학공부

△49년 모스크바대 유학

△58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성서기실 이론서기

△65년 김일성종합대 총장

△66년 논문 ‘사회발전 동력’ 발표. 인텔리의 역할을 강조한 이 논문으로 이후 2년간 혹독한 자아비판. 이 때부터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인류역사의 발전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

△71∼74년 주체사상의 철학이론화 작업에 몰두

△∼97년 최고인민회의의장, 조선노동당 과학교육담당 비서, 주체사상연구소 소장 등 역임

△97년 4월 20일 중국 거쳐 한국으로 망명

△2002년∼현재 명지대 및 전주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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