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급식 조례' 논란]"아이들 건강 먼저인가" "法 먼저인가"

  • 입력 2003년 10월 20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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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급식 조례제정 전남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 8일 서울 정부중앙청사에서 행정자치부의 조례안 재의 요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제공 학교급식조례제정 전남운동본부
학교급식 조례제정 전남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 8일 서울 정부중앙청사에서 행정자치부의 조례안 재의 요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제공 학교급식조례제정 전남운동본부
‘법이 먼저냐, 아이들의 건강이 먼저냐.’

전국 초중고교에서 질 낮은 급식이 사회문제로 비화되자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들이 학교급식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학부모들의 ‘호주머니’(학생 1인당 1800∼2500원)와 적은 교육예산에 의존하는 학교급식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전폭적으로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은 곧바로 난관에 부닥쳤다. 일반자치와 교육자치로 이원화돼 있는 지방자치법 체계상 시도지사는 별도의 법적 근거 없이 교육 사무에 돈을 지원할 수 없다는 정부의 경직된 입장 때문이다.

○지자체 ‘학교급식개선’ 물결

처음 불을 붙인 것은 전라남도였다. 전남도 의회는 주민 4만9549명이 발의한 ‘학교급식 식재료 사용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재의결하고 전남도는 이를 20일 공포했다. 주민들의 발의로 조례가 제정된 건 사상 처음이다.

전남도 조례는 “전남 도지사와 전남도 교육감은 유아교육기관 및 학교 급식에 우수 농수산물이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소요 경비 중 일부를 지자체 재정의 범위 내에서 도지사가 교육감 및 시장 군수에게 지원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또 지원을 받고자 하는 대상자가 지원대상자와 급식시설, 설비의 위치와 규모, 지원받고자 하는 금액 등을 구체적으로 적어 도지사와 교육감에게 제출하면 도와 도의회 대표, 시민단체, 학부모들로 구성된 학교급식지원심의위원회가 지원 대상과 규모를 최종 결정하게 된다.

경북도의원 14명이 지난 달 발의한 ‘경북학교급식 재료사용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은 이달 초 도의회 교육환경위를 통과했다. 조례의 내용은 ‘지자체가 지역 농수축산물을 학교급식에 사용하는 재료비 일부를 지원한다’는 것.

‘학교급식 조례를 위한 대구운동본부’는 조례 제정을 위한 주민 발의에 필요한 서명을 받고 있는데 현재 7000여명의 서명을 받았다. 운동본부측은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올바른 식습관을 들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전교조 경남본부 등 경남지역 37개 단체가 출범시킨 ‘학교급식 조례제정을 위한 경남연대’도 도 교육위에 조례제정 청원서를 냈다.

○논란과 쟁점

이런 조례제정 운동은 대다수가 벽에 막혀 있는 상황이다. 나주시 의회는 지난 달 전남도와 비슷한 내용의 조례안을 의결했으나 학교급식 재료로 ‘우리 농산물’을 특정하는 바람에 외교통상부가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근거해 “외국산 농산물을 차별하는 것은 무역마찰을 초래할 수 있다”며 나주시장에게 대법원 제소를 요청한 상태이다.

전북도교육위도 2일 당초 ‘우리 농산물’로 제한했던 조례안을 ‘우수농산물’로 표현을 바꿔 재의결했다.

정부는 “법 개정을 위해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입장이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지자체 관련법이 갖고 있는 문제점 때문이다. 우리 지자체법은 교육의 독립성을 위해 일반자치와 교육자치를 엄격히 분리하고 있다. 교육 관련 사무는 시도지사의 간섭 없이 시도교육감이 교육비 특별회계를 통해 운영하고 있는 것.

행자부에 따르면 일반 지자체가 교육 사무에 예산을 지원하려면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현 학교급식법은 “학교급식에 필요한 경비를 설립 경영자와 학부모 부담을 원칙으로 하며 다만 식품비 및 연료비, 인건비 외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지자체와 국가가 지원할 수 있다”(제8조 2항)고 돼 있다. 즉 식품비는 지자체가 지원할 수 없다는 뜻이다.

행정자치부는 학교급식법에 “지자체가 식품비를 지원할 수 있다”는 재료비 지원 근거 조항을 넣어 법을 개정하면 지자체법과 아무런 충돌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지방교육교부금법, 도서관 및 독서진흥법 등 개별 법령이 있는 경우 시도지사가 교육사무 쪽에도 예산의 일부를 지원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내에서도 WTO 규정에 따른 외국과의 마찰을 우려하는 외교통상부, 우리 농산물 소비 정책을 펼치고 있는 농림부, 자치사무와 교육사무간의 법체계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는 행자부 등의 입장이 모두 달라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대안과 전망

학교급식 논란의 이해 당사자들은 기본적으로 국가와 지자체의 급식개선 지원이라는 대의(大義)에는 공감하면서도 해결방법에서는 의견 차이가 있다.

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는 정부의 법 논리 논쟁 때문에 학교 현장의 피해는 줄어들 줄 모른다는 입장이다. 이 단체 이진파 사무처장은 “우리 아이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를 놓고 왜 정부가 틀에 얽매이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이 처장은 또 “식재료로 우리 농산물의 사용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학교급식연구회의 최재석 정책실장은 “정부는 식재료를 직접 지원하지 말고 급식시설 운영비를 지원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식재료 단가가 올라가는 방법을 취하고 도농간 협력프로그램을 마련해 좋은 식재료 공급과 학생들의 현장체험 및 경제교육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무조정실 식품안전기획단의 장상진 과장은 “각계각층의 취지를 살려 관련법을 개정해 지자체별로 학교급식 조례제정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

대구=정용균기자 cavatina@donga.com

제주=임재영기자 jy788@donga.com

▼정연국 조례지정 전남운동본부장▼

“이제 8분 능선을 넘었을 뿐입니다. 학교급식 조례는 학생들의 건강을 지키고 잘사는 농어촌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꼭 시행돼야 합니다.”

‘급식개혁과 우리 농산물 이용을 위한 학교급식조례제정 전남운동본부’의 정연국(鄭然國·전남 장흥군 관산중 교사·사진) 본부장은 “전남에서 처음 시작된 급식조례 제정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돼 기쁘다”고 말했다.

175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전남운동본부가 결성된 것은 지난해 11월. 그동안 토론회와 설명회 등을 열며 학교급식조례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해온 전남운동본부는 지난달 5일 소중한 결실을 거뒀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주민 발의로 청구한 ‘학교급식 식재료 사용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이 전남도의회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정 본부장은 “위탁 급식으로 식중독 사고가 끊이지 않고 학부모의 부담도 가중되는 현행 학교급식법으로는 최상의 급식을 할 수 없다”며 “당장 학교급식법 개정이 어렵기 때문에 자치단체가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학교 급식을 지원할 수 있도록 조례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정부 부처에서는 별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행정자치부만 관계법령 등을 들먹이며 발목을 잡는 까닭을 모르겠다”며 “전국 16개 시도 운동본부와 전교조, 학부모단체, 농민단체 등과 함께 이달 말 ‘학교급식법 개정과 조례제정을 위한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 총력투쟁에 나설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조례에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배 등의 이유 때문에 ‘우리 농산물’이라는 표현을 넣지 못한 게 아쉽지만 조례제정 운동이 주민 참여 및 자치운동의 모델이 됐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정 본부장은 “조례가 공포되고 예산이 확보되면 학부모의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며 “학교급식의 최일선 현장에서 우수 농산물로 학교 식단을 짜려고 노력해야만 이 운동의 성과가 빛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 투쟁 당시 해직의 아픔을 맛봤던 정 본부장은 94년 복직해 97∼98년 전교조 전남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광주=정승호기자 shjung@donga.com

▼올 식중독 3625명…작년의 4배▼

해마다 학교급식을 실시하는 초중고교가 늘면서 식중독 사고도 덩달아 급증해 학교급식 문제가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올해 8월 말까지 전국 초중고교에서 발생한 급식 식중독 사고는 35건, 3625명으로 지난 한 해 동안 발생한 9건, 806명에 비해 4배가량 늘었다.

식중독이 빈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질 낮은 급식 재료와 학교 급식소의 불량한 위생상태 때문.

우선 정부가 한정된 예산으로 급식을 제공하는 학교 수 늘리기에만 급급해왔다는 지적이 많다. 1996년 학교급식법을 개정해 위탁급식제도를 도입한 것도 학교에 조리장과 식당 등 설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급식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한 끼에 최대 2500원가량인 급식비에서 위탁급식업체가 중간마진을 떼어내면 식재료나 위생설비에 투자할 금액은 그만큼 적어진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박창달(朴昌達·한나라당) 의원은 “잘못된 온도관리와 부적절한 조리, 오염된 급식시설과 함께 안전하지 못한 식품 등이 식중독 급증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상당수의 학교급식 시설이 조리장 공간이 구획되지 않은 채 식자재 반입, 검수, 조리, 배식 등이 모두 한 공간에서 이뤄지는가 하면 위생유지를 위한 냉난방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도 많다고 지적했다.

이러다보니 학교급식에 대한 만족도는 당연히 낮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가 7월 한달간 전국에서 학부모 1365명과 학생 1835명을 상대로 조사한 ‘학교급식과 매점실태 파악을 위한 설문조사’에서 급식만족도를 묻는 질문에 ‘불만족스럽다’는 응답이 47.6%에 달했으며 ‘보통이다’는 39.6%, ‘만족한다’는 12.8%에 그쳤다. 한편 서울지역에서는 6.1%만이 ‘만족한다’고 대답했다.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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