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칼럼]송두율과 이명준

  • 입력 2003년 10월 6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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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비판적 성찰자인 ‘경계인’으로 머물겠다던 재독(在獨) 학자 송두율(宋斗律)씨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밝혀졌다. 송씨는 그것은 북측이 ‘일방적으로 씌운 감투’이며 실질적인 의미에서 정치국 위원이라는 것을 한번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동안 자신이 북한 권력의 핵심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 왔던 것이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변명이 사실을 덮지는 못한다. 그가 진정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모색하기 위해 37년 만의 고국방문을 결정했다면 귀국을 전후해, 늦어도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기 전에 진실을 털어놓았어야 했다. 그러면서 해명이든 변명이든 했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할 바에야 귀국하지 않는 편이 옳았다. 그것이 그가 선택할 길이었다.

▼ 광장 없는 시대의 환멸▼

송씨는 “가장 상상하기 싫은 상황은 추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한다면 이제 그가 선택할 길은 없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원숙한 처리’라는 말을 했지만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어떻게 처리해야 원숙한 것인지, 더구나 그 과정에서 빚어질 남남(南南) 이념갈등을 과연 원숙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노릇이다. 따라서 송씨는 엄정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다. 물론 분단의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경계인일 수 없었던 어느 경계인’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최인훈(崔仁勳)의 소설 ‘광장(廣場)’의 주인공 이명준이 떠오른다. 광복 직후 월북한 아버지를 둔 철학도 이명준은 어느 날 아버지가 대남방송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불려간다. 일제강점기가 좋았다는 남한 형사는 “너 따위 빨갱이 새끼 한 마리쯤 귀신도 모르게 해치울 수 있어”라며 그를 폭행한다. 자신만의 밀실에 갇혀 젊은 날의 꿈을 소통할 광장을 찾지 못하던 이명준은 남한의 현실을 경멸하고 북행 밀항선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이명준이 찾은 북에도 광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진정한 ‘인민공화국’이 아니었다. 혁명은 없고 혁명의 흉내만 있는, 신념이 아니고 신념의 소문뿐인 ‘잿빛 공화국’일 뿐이었다. 그는 사람은 없고 꼭두각시만 있는 광장에 환멸을 느꼈다. 전쟁포로가 된 그는 정전(停戰) 후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행을 선택하고 인도로 가던 중 실종된다. 비록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이명준은 분단된 남과 북의 어느 한쪽은 물론 제3국도 선택할 수 없었던 철저한 ‘경계인’이 아니었을까.

이명준이 남중국해에 몸을 던지고 20년 세월이 흐른 1973년. 그 전 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스물여덟의 나이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송두율은 북한을 방문해 노동당에 입당한다. 그는 노동당 입당이 북한에 입국하기 위한 ‘통과의례’였다고 주장하지만 남을 경멸했던 이명준이 북으로 갔듯이, 남의 유신체제에 환멸을 느낀 송두율이 북을 찾은 것이다. 다시 18년이 지난 1991년 송두율은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된다. 이 또한 뒤늦게 알게 된 ‘원치 않은 감투’였을 뿐이라고 하지만 이미 그는 ‘경계인’이 아니었다.

▼‘경계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1980년대 송두율은 북한의 눈으로 북한을 이해하자는 ‘내재적 접근법’을 주창한다. 남쪽의 잣대로 북쪽을 재지 말고 그들의 체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북을 보는 냉전적 시각을 보다 넓히는 유효한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북의 세습독재체제를 결과적으로 옹호한 측면이 보다 강하다. 더구나 ‘북한의 눈’이라고 할 때 그 주체는 결국 무엇인가. 이른바 수령이요, 주체사상이라고 할 때 내재적 접근의 한계는 명백하다. 역설적이게도 송두율이 환멸을 느꼈던 박정희(朴正熙) 유신체제 역시 내재적으로 접근한다면 나름의 존재이유를 갖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이제 ‘해외민주인사 송두율’도, 그의 ‘내재적 접근법’도 유효할 수 없다. 송씨가 계속 자신을 ‘경계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그러나 이명준이 남중국해에서 ‘경계인’의 삶을 마감했듯이 송씨 또한 남한에서 더는 ‘경계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 슬픈 일이다.

전진우 논설위원실장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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