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3년 10월 1일 18시 17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북한에서 대남공작기구인 ‘한국민족민주전선’ 산하 단체에서 활동하던 오씨는 86년 11월 독일 유학생을 유인, 입북시키라는 지령을 받고 다시 유럽으로 나온 뒤 독일 정부에 망명했다.
이후 북한에 남겨둔 처와 자식의 송환을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92년 4월 주독 한국대사관을 통해 자수했다. 그는 자수 직후 국내에 들어와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은 뒤 95년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 ▼관련기사▼ |
| -"김일성 먹었다던 썩은 감자국수 먹으며 눈물" -"송교수 의혹 규명후 원칙대로 처리를" |
“나는 ‘간첩’이 됐는데 그 사람은 민주인사가 되고….”
1970, 80년대 독일 유학 중 송두율(宋斗律·59) 독일 뮌스터대 교수 등과 함께 반정부 활동을 벌이다 입북했던 오길남(吳吉男·61)씨는 1일 우리 사회 일각에서 송 교수를 ‘민주인사’로 여기는 분위기에 대해 이같이 회한을 토로했다.
송 교수는 지난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의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온 뒤 당시 오씨의 입북을 권유한 혐의에 대해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았다.
한 국책연구소에서 책임 연구위원(경제학 박사)으로 근무하는 오씨는 이날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송 교수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는 듯 처음에는 “그는 정말 뛰어난 학자고 막역한 친구였는데…”라며 주저하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오씨는 먼저 ‘북한에 입국하기 위해 통과의례적인 의미로 평양 공항에서 노동당 입당서를 썼다’는 송 교수의 주장에 대해 “노동당 가입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오씨는 “나를 비롯해 당시 외국에서 입북한 학자들 중에서 노동당원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며 “나도 입북 당시 노동당 가입을 생각했으나 그게 1, 2년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송 교수가 간단한 절차를 거쳐 노동당원이 됐다면 그가 정말 중요한 직무를 수행했고 김일성(金日成) 등 북한 핵심부가 그것을 인정했다는 뜻일 것”이라며 “실제 송 교수는 대남 공작을 총괄하던 허담(許錟) 전 대남담당 비서 등 북한 정권 핵심부의 총애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오씨는 송 교수가 북한에서 받은 대접의 수준을 볼 때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북한에 있을 때 부총리급 월급을 받는 등 거물 대접을 받았지만 송 교수는 북한에 올 때마다 벤츠 승용차를 이용하는 등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가 북한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겠지만 후보위원 등 정권 핵심인사에 준하는 대우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라고 전했다.
오씨는 송 교수의 입북 권유 의혹에 대해서는 “송 교수는 원래 무슨 말이든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 편”이라며 “다만 방향제시 정도는 있었다”고 말끝을 흐렸다.
송 교수를 원망한 적이 없느냐는 질문에 오씨는 “이번에 국정원 조사과정에서 나도 불려가 송 교수와 대질신문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송 교수가 진술을 자꾸 번복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고만 대답했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 | ![]() ![]()
|
|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