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승련/‘北 라디오보내기’ 막는 이유는?

  • 입력 2003년 8월 24일 18시 23분


코멘트
23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지 아시아판 1면에는 큼지막한 컬러 사진이 한 장 실렸다. 한국 중국 등을 오가며 탈북자를 지원해 온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이 한국 전투경찰에게 ‘들려나가는’ 장면이었다. 사진 속의 폴러첸씨는 비닐풍선에 묶은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사진의 해프닝은 폴러첸씨가 북한에 외부 소식을 전할 라디오를 보내려는 과정에서 빚어졌다. 그는 22일 강원 철원군의 옛 북한노동당사 건물에서 소형 라디오 600개를 담은 비닐 풍선 20개를 북쪽으로 날려 보내려고 시도했다. 이에 앞서 그는 11일 “북한 주민이 한국방송공사(KBS) 사회교육방송 등 서방의 방송을 들어야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며 이런 계획을 공개했었다.

그러나 철원경찰서는 폴러첸씨 일행을 당사 건물에서 1km 떨어진 곳에서 “사전 집회신고가 없었다”는 이유로 제지했다. 경찰은 “사진 속의 충돌은 폴러첸씨가 약속을 어기고 무리하게 풍선을 띄우려다 빚어진 일이다”고 해명했다.

이번 사건은 표면적으론 한 시민단체의 절차를 어긴 행동에 경찰이 정당히 공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북한 정권을 어떻게 보느냐는 시각차로 양분된 한국사회의 남-남 갈등을 드러낸 사안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폴러첸씨가 시도한 대북 라디오 보내기는 비록 집시법 위반이라 할지라도 경찰이 억지로 저지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행사 자체가 폭력적이지도 않았고, 북한 주민들에게 라디오를 통해 자유의 소리를 전달하겠다는 그의 취지 역시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법 집행을 내세워 국제적인 해프닝을 빚은 것은 폴러첸씨의 행동이 북한을 자극하는 것을 정부가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최근 한총련이나 노동계의 강성 시위에 그렇게도 관대했던 경찰이 유독 폴러첸씨의 행동에 대해서만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폴러첸씨 일행은 이번 해프닝을 “북한을 돕는 민간 활동은 지원되지만, 북한을 자극하는 행동을 막고 싶은 한국 정부의 속내가 드러난 일”이라며 “최근 대구 유니버시아드를 앞두고 벌어진 보수단체의 인공기 훼손에 북한이 반발하자 정부가 서둘러 사과한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정부의 대북한 저자세가 다시 확인됐다”고 말하고 있다.

폴러첸씨는 라디오 보내기를 통해 북한이 자유롭지 않은 사회임을 국제사회에 보여주려 했으나 결과는 엉뚱하게도 한국의 대북 눈치보기를 온 세상에 알린 셈이 됐다.

김승련 정치부기자 sr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