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인선파문 어디로]'청와대 vs 사법부' 갈등 번지나

  • 입력 2003년 8월 14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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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 문제를 둘러싼 파문이 계속되는 가운데 14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현관 위에 걸린 법원 마크가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이훈구기자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 문제를 둘러싼 파문이 계속되는 가운데 14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현관 위에 걸린 법원 마크가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이훈구기자
신임 대법관 인선 문제를 둘러싼 불협화음이 자칫 사법부와 청와대간의 갈등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는 물론 이번 사태에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주무 수석비서관인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나 윤태영(尹太瀛) 청와대 대변인은 “사법부 내부의 일에 대해 우리가 뭐라 말할 입장이 아니다”며 입을 굳게 닫았다.

그렇지만 청와대 내부 분위기는 연판장을 작성한 판사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쪽이다. 이미 강금실(康錦實) 법무부 장관이 기존 관행대로 대법관을 제청하려 한 대법원의 방침에 반발해 대법관 제청 자문위원직에서 사퇴한 것도 청와대의 시각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청와대의 고민은 판사들의 주장에는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사법부와의 대충돌이 불가피한 대법관 제청 거부라는 ‘초강수 카드’를 과연 끄집어낼 것인가에 있는 듯하다.

대통령의 대법관 후보에 대한 임명 거부 사례는 1958년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이 법관추천위원회가 제청한 대법관 후보에 대해 임명을 거부한 것이 유일하다.

또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제청 또는 임명 거부라는 행동에 나설 경우 자칫하면 사법부의 독립 침해라는 비판에 직면하는 동시에 사법부와의 정면충돌을 감수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특히 헌법에 규정된 대법관 임명 절차가 ‘대법원장의 제청→국회 동의→대통령 임명’으로 3권 분립에 의한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반영돼 있어 국회에서 임명동의안까지 통과될 경우 노 대통령이 이를 거스르고 임명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법률적으로도 대통령이 임명거부의 권한을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 그동안 대법관 임명을 사실상 대법원장이 주도해 왔던 관례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가 판사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는 데 대해 대법원은 헌법상 3권 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의 최고위직 인사를 청와대의 뜻에 따라 바꿀 경우 이는 사법권 침해나 사법부의 굴복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더욱이 임기가 2년밖에 남지 않은 최종영(崔鍾泳) 대법원장은 재판 능력을 인정받은 후보자를 선택하겠다는 입장이 확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사법부 개혁이 당장의 최우선 과제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경제 민생현안이 많고, 정치상황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법부와 전면전을 벌이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얘기다.

실제로 민정2비서관실이 정부 출범 이후 ‘사법제도 개혁’에 관한 검토안을 마련했으나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내부 판단에 따라 논의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청와대는 제청 거부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거론하면서 대법원이 현재의 태도를 바꿔 소장 판사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는 절충안을 ‘알아서 내주기’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연판장 서명안한 대다수 법관▼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 재고를 요구하기 위해 144명의 소장 판사들이 연판장에 서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상당수 법관들은 사태를 관망하거나 서명에 반대하고 있다.

14일 현재 전국의 법관 수가 총 2000여명인 점을 감안하면 전체 법관의 10%에도 못미치는 법관이 연판장에 서명한 셈이다. 90% 이상의 법관들은 사태를 관망하거나 서명에 반대한다고 볼 수 있다.

관망 및 반대파 법관들은 크게 3가지 이유로 연판장 서명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 이들은 우선 대법관 제청 문제의 본질은 제청 후보자들의 ‘자질’과 ‘재판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대법관 제청 후보자에 법원 외부 인사를 끼워 넣느냐 마느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외부 인사를 제청 후보자로 추천하지 않은 대법원장의 결정에 상당한 고민과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들어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대법원장도 외부 인사가 추천되기를 바라는 일반 여론의 흐름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만약 여론을 의식했다면 외부 인사를 1, 2명 끼워넣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소장 판사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법원 내부 인사를 추천한 것은 그만큼 재판 능력과 법원 조직의 안정성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둘째, 관망 및 반대파 법관들은 법원 내부의 인사문제를 가지고 갈등을 빚고 있는 것처럼 국민에게 비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분위기다.

재경 지원의 한 단독판사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대법관 제청 방식 문제가 도마에 올라 있지만 따지고 보면 법원 내부의 인사 문제가 아니냐”며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인데 법관들이 인사문제를 가지고 집단행동을 하는 것이 국민에게 한심스럽게 비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시민단체와 재야 법조계의 의견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특히 연판장 서명에 반대하는 판사들의 입장은 더욱 강경하다. 이들은 시민단체와 재야 법조계의 의견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이들의 요구를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주장한다. 서울지법의 또 다른 한 부장판사는 “시민단체와 재야 법조계가 제시한 의견이 검증되지도 않았는데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반발하는 것은 근거가 약하다”고 비판했다.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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