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停戰 50돌]<上>우리사회에 끼친 영향

  • 입력 2003년 7월 23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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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식 장면. 왼쪽이 유엔군측 수석대표인 윌리엄 해리슨 미국 해군 중장, 오른쪽이 북한측 수석대표인 남일 인민군 대장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식 장면. 왼쪽이 유엔군측 수석대표인 윌리엄 해리슨 미국 해군 중장, 오른쪽이 북한측 수석대표인 남일 인민군 대장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국전쟁을 중단시킨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27일로 50주년을 맞는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총성은 멈췄지만 한반도의 평화는 불안하다. 정전협정이 전쟁을 완전히 끝낸 것이 아니라 이를 일시 멈춘 것이기 때문이다. 냉전 종식 후에도 한반도에 전쟁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북한 핵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전체제의 그늘인 셈이다.》

▽협정의 성립 과정=정전협정은 1951년 7월 10일 첫 회담 이후 모두 765차례의 회담 끝에 53년 7월 27일 윌리엄 해리슨 미 해군 중장과 남일 북한 인민군 대장의 서명으로 조인됐다.

정전협정이 논의된 것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확대되고, 승산 없는 전쟁이 장기화될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6·25전쟁은 한국군 13만7889명, 유엔군 4만670명이 전사하고, 남북 양측을 포함해 55만5000여명이 부상했을 정도로 인명 피해가 컸다. 이에 따라 아시아 아랍 13개국이 유엔 정치위원회에 제출한 ‘정전을 위한 3인위원회 설치안’이 통과되면서 정전 논의는 본격화됐다.

정전협정은 완충지대로 비무장지대(DMZ)를 설치하고 이 지역 내 적대행위 방지, 군사정전위의 허가 없는 군사분계선(MDL) 통과나 DMZ 출입 금지, 군사정전위원회(MAC)와 중립국감독위원회(NNSC) 설치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국회는 51년 6월 한국 주권하의 한반도 통일 실현 이외엔 어떤 정전도 반대한다는 내용의 휴전반대 결의문을 채택했다.

한국은 협정 조인 2개월 전 유엔군측이 반공포로 석방계획을 변경한 데 반발해 정전회담에 불참했다. 이후 단독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한 정부는 53년 12월 실향민 처리 및 시신 발굴, 교환 등을 위해 군사정전위원회에 연락장교를 파견하고, 54년 9월 38차 군정위에 유엔사측 대표의 일원으로 다시 참여했다.

정전협정은 현재 북한의 정전협정 무력화 조치로 사실상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은 57년 군사력을 증강해 ‘정전협정 당사자의 무기 증강을 금지하고 이를 중립국 감시단이 감시한다’는 협정 13조 d항을 파기했고, 미국은 이에 맞대응했다.

북한은 또 91년 3월 군정위 유엔사측 수석대표에 황원탁(黃源卓) 소장이 임명되자 92년 8월 북측 수석대표를 소환해 이후 정전위 회의가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

또 북한이 중감위 위원에 대한 승계를 반대하는 바람에 공산군측 위원인 체코, 폴란드 대표단이 철수했다. 현재 정전협정 중 유일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이 MDL과 북방한계선(NLL)뿐이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협정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그 실효성 여부와 관계없이 정전협정은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국방의 의무를 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정전 상태와 관련이 있다.

정전협정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해온 안전판 구실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남북의 정치권력이 체제 공고화와 독재정권 유지에 이용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이장희(李長熙)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정전협정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 때로는 전시라는 이유를 들어 민주화를 늦추고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 행사에 부담으로 작용해 왔다”고 말했다. 정권 안보를 위해 정전협정을 이용했다는 얘기다.

정전협정은 문화 속에도 깊이 파고들어 왔다. 윤흥길의 소설 ‘장마’는 아들을 국군과 인민군 빨치산으로 각각 내보낸 두 할머니의 갈등을 다뤘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판문점 근무 남북 병사들을 옭아맨 정전의 현실을 통해 분단의 비극을 일깨웠다.

99년 6월 연평해전과 지난해 6월 서해교전은 북한이 새로운 ‘해상분계선’과 ‘서해5도 통항질서’를 주장하면서 정전협정에 도전한 것이 배경이었다. 그런가 하면 남북교류에선 항상 군사분계선 통과 문제가 논란이 된다.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이분법적 인식이 정전협정 및 남북분단의 상황에서 나온 병리적인 현상이라는 해석도 있다. 통일연구원 허문영(許文寧) 선임 연구위원은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이나 정전 및 냉전체제가 가져온 극단적인 인식이 사회 전체의 균형적인 인식과 관용적인 자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유재흥 前국방장관 “전쟁은 영화아닌 엄연한 현실”▼

한국 전쟁 당시 육군본부 참모차장으로 정전회담에 참가했던 유재흥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장(전 국방부장관)이 16일 전쟁기념관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박영대기자

“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휴전선 155마일에 걸쳐 엄청난 군대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채 잠시 쉬고 있는 거지요.”

6·25전쟁의 산증인이자 정전회담 참가자였던 유재흥(劉載興·83·전 국방부장관) 6·25참전 전우기념사업회장은 정전 50주년을 맞아 16일 “젊은 세대는 전쟁이 TV나 영화 속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숨쉬고 있는 현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53년 7월 27일까지 열린 정전회담엔 한국군 장성이 교대로 유엔측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백선엽(白善燁), 이형근(李亨根) 장군에 이어 52년 1월부터 6개월간 육군본부 참모차장으로 정전회담의 유엔측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회담엔 유엔측에서 수석대표인 미 극동사령관 다나 조이 제독과 미 육해공군 장성 및 유 회장 등 5명이, 북한측에선 수석대표 남일과 중공군 장성 등 5명이 각각 참석했었다.

유 회장은 노환으로 몸이 불편했으나 판문점 임시텐트에서 열렸던 회담을 생생히 기억했다.

“회담에선 양측 수석대표만 발언권이 허용된 가운데 팽팽한 긴장 속에 밀고 당기는 지루한 공방이 계속됐죠.” 당시 주요 현안은 △휴전선 획정 △전쟁포로 교환 △서해 북방한계선(NLL) 획정 문제 등이었다.

“북측은 38도선을 휴전선으로 획정하고 포로를 모두 북송하라고 강력히 요구했지만, 우리는 어느 것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양측이 맞서면서 몇 시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거나 어떤 경우엔 회담이 시작된 지 5분 만에 무산된 적도 있었죠.”

그는 한국군 장성으로 정전회담에 나서야 했던 만큼 더 많은 갈등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과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전협정이 분단 영구화와 북한의 재남침을 초래한다며 결사반대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제게 ‘유엔측이 더운밥을 먹고 식은 소리를 한다’면서 정전회담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반면 유엔대표부의 미측 수석대표는 유 회장을 회담 대표로 임명하며 “지금부턴 내 명령 외에 이 전 대통령을 포함한 어느 누구의 명령도 받아선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 순간 유 회장은 미국이 더 이상 피를 흘리길 원치 않으며, 정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을 절감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연일 후퇴하자 종전을 위해 만주의 군 보급기지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됐죠. 그러나 갈수록 미군의 희생이 커지고 제3차 세계대전의 우려가 높아지면서 휴전은 기정사실로 굳어졌던 겁니다.”

이후 이 전 대통령은 정전을 전제로 북한군의 재남침에 대비한 미측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얻는 데 주력한 가운데 유엔군과 북측은 협정 체결 직전까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전선 곳곳에서 치열한 공방을 계속했다.

“회담 중에도 바로 옆 전선에선 미군의 B-29 폭격기가 적을 향해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습니다. 유엔군은 협정 체결 전까지 평양∼원산선을 점령할 계획이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이 과정에서 이 전 대통령이 53년 6월 18일 2만6000여명의 반공포로를 독자적으로 석방해 유엔군측과 큰 마찰을 빚고, 정전협정 체결을 불과 2주 앞둔 7월 13일엔 중공군이 막바지 대규모 공세를 벌여 협정체결은 더욱 늦어졌다고 그는 말했다.

최근 북한핵 문제로 인해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해 그는 “더 이상 북한 지도부의 눈치를 봐선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정전 이후 그동안 ‘선군정치’를 내세워 주민들을 혹사시켜온 북한 지도부에 분명히 경고해야합니다. 명분 없는 대북 지원은 핵 위기를 초래했고 결국 북한 정권만 연장시킬 뿐입니다.”

그는 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는 북측의 주장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서해교전이 보여주듯이 북한이 군사적 야욕을 버리지 않는 한 평화협정은 ‘허상’일 뿐”이라며 “북측이 핵 포기를 비롯한 군사적 신뢰조치에 먼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대로 가면 북한 정권은 조만간 붕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젊은 세대들이 정전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고 확고한 안보 의식으로 북한의 도발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때입니다.”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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