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5억 北송금]"不法 알고도 수사유보는 직무유기"

  • 입력 2003년 2월 3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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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현대상선의 2235억원 대북 비밀송금 의혹사건에 대해 3일 ‘수사 유보’ 결정을 내린 것은 이 사건이 지닌 정치 외교적 이해관계를 고려해 먼저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취임이 얼마 남지 않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가 3일 “진상 규명의 주체와 절차, 범위 등은 국회가 판단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검찰 안팎의 관측이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검찰이 수사하지 않는 한 ‘진상 규명’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대북 송금 과정의 불법행위 등 범죄 혐의가 일정 부분 드러났는데도 검찰이 수사를 사실상 ‘중단’한 것은 법 절차를 무시한 행위라는 지적도 있다. 일각에서는 검찰의 직무유기라는 비판도 제기하고 있다.

현대상선의 2000년 6월 대북 송금은 정부 관계 부처의 공식허가 및 신고를 거치지 않은 만큼 일단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에 해당한다. 북한에 보낸 돈이 남북경협 자금이라는 감사원의 발표 역시 현대상선의 일방적인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에 불과해 실제 돈이 건네진 명목이 무엇인지, 일부가 정관계 로비자금 등으로 전용되지 않았는지 등에 대한 수사도 필요한 상태다. 또 정부가 대북 송금 사실을 줄곧 부인하다가 최근에야 말을 바꾼 이유와 현대상선에 대한 대출 과정에서의 외압 여부 등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같이 범죄 정황과 수사 단서가 상당히 드러난 상태에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시각이다. 고려대 법대 장영수(張永洙) 교수는 “범죄 단서가 있는 사안에 대해 국민이 의혹 해소를 요구하면 국가기관인 검찰은 수사에 나서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게다가 지난해 10월 자유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들의 고발로 이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미 진행 중이고 그동안 광범위한 정황 조사 및 법률 검토를 통해 수사 단서를 상당히 확보한 상태라는 점도 수사를 유보한 결정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근거가 된다.

검찰이 신속하게 수사하지 않은 채 일부 정치권이 거론하는 국정조사나 특검제를 도입할 경우 정치공방이 이어지고 시간이 지연돼 핵심관계자들이 증거를 은폐하거나 도피하는 사태로 비화될 수 있다는 사실도 역시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양측 뒷거래 있었나▼

현대상선이 북한에 2235억원을 보내는 대가로 현대그룹은 무엇을 받았을까.

기업은 철저히 이익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2억달러나 되는 뭉칫돈을 북한에 보내기 전에 청와대로부터 뭔가를 보장받았다고 보는 것이 정상이다.

2000년 당시 현대그룹은 3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졌던 ‘왕자의 난’으로 시장의 신뢰가 떨어진 상태였다. 국내외 채권단들은 대출금을 무차별적으로 회수했다. 특히 현대는 금융·기업구조조정을 총괄했던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를 제쳐놓고 대북사업을 담보로 청와대와 담판을 지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 계열사 지원 보장받았나〓당시 금융권에서는 현대건설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 두 곳을 모두 살리기에는 채권단의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살려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왕자의 난’이 시작되면서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맡고 있던 현대건설이 가장 먼저 빚 독촉에 시달렸다. 해외 채권단은 만기연장을 거부한 채 빚을 적극 회수했으나 국내 채권단은 연말까지 신규 자금지원 없이 만기연장을 해줬다.

그런데 2000년 10월 마침내 현대전자의 유동성 위기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반도체가격이 급락하고 2000년 4·4분기(10∼12월)부터 6개월 동안 회사채 4조2000억원의 만기가 몰리면서 심각한 자금난을 겪었던 것.

이때 채권단은 예상과 달리 현대건설과 전자 모두를 살리기로 했다.

현대건설은 2001년 3월 출자전환 1조4000억원, 유상증자 및 전환사채(CB) 발행 1조5000억원 등 2조9000억원을 지원받았다. 현대전자는 2000년 12월 산업은행의 회사채 신속인수대상 기업으로 선정돼 유동성 위기를 넘겼다.

이에 대해 대북송금의 대가로 그룹의 핵심 주력계열사 두 곳을 살렸다는 분석이 많다.

▽불발로 끝난 카지노 사업권〓금강산 관광사업이 엄청난 적자를 냈지만 현대그룹이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선상카지노 사업 때문이었다.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의 조건으로 카지노 허가를 계속 요구했고 통일부의 내락을 받았다. 그러나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는 ‘대기업이 카지노사업에 손을 대는데 대해 국민의 반감이 크다’는 이유로 계속 보류했고 지금까지도 허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대는 정부의 최종인가가 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관광선에 카지노 설치공간을 확보해둔 상태였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현대그룹은 금강산 관광선에 카지노만 설치하면 관광사업 자체가 흑자로 돌아설 수 있다고 판단해 끈질기게 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결국 무산됐다”고 말했다.

한편 2000∼2001년 재경부와 금감위는 현대그룹 사태를 해결하면서 시장원리에 따라 처리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현대그룹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구조조정본부에서 청와대와 직접 담판을 지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현대그룹이 청와대 관계자와 직접 만나 대북 경제협력 사업을 미끼로 담판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정부의 현대그룹 구조조정방안이 수정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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