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 여전해 아쉬워요”

  • 입력 2002년 12월 20일 00시 14분


“어머어머 어떡해….”(안타까운 표정)

“거봐, 내가 뭐랬어?”(흐뭇한 웃음)

가족 4대가 개표상황을 지켜본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이원구씨(65·명지성모병원 이사) 집은 희비가 수시로 교차했다.

집에는 이씨의 어머니 김의순 할머니(100)부터 이씨의 손자 효준군(2)까지 4대가 모여 대선 레이스를 지켜봤다. 이씨의 부인 송은숙씨(62·전직교사), 송씨의 동생 태숙씨(57·주부), 이씨의 아들 태희씨(31·회사원), 며느리 박지윤씨(27·주부), 앞집에 사는 박명숙씨(58)까지 가세해 모두 8명이 TV 앞에 모여 앉았다. 가족들은 “월드컵 이후 이렇게 많은 가족이 한데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정치적 선호는 ‘자율’에 맡긴다는 것이 가장인 이씨의 방침. 서로가 어떤 후보를 찍었는지는 밝히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개표 직후부터 팽팽한 ‘신경전’이 시작됐다.

민주당 노 후보가 박빙의 차로 앞서자 한나라당 이 후보 ‘지지자’들은 맥 빠진 모습. 그러나 ‘오차범위 안이라서 예측불허’라는 방송해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등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이 이어졌다.

오후 8시반까지 불과 몇 만표 차이로 엎치락뒤치락 하는 모습이 이어지자 가족들은 “숫자놀음 같다”며 개표방송 방식쪽으로 화두를 돌렸다.

“개표방송에 오락 프로그램을 넣으니 재미가 있네요.”(박지윤)

“그게 뭐가 재미있니? 나는 계속 아래쪽에 나오는 득표율만 보인다. 선거방송에 왜 코미디를 넣었는지 모르겠네.”(송은숙)

얘기꽃이 막 피어오르던 오후 9시, 노 후보의 우세가 확정적으로 보도되자 이 후보 지지자들은 방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노 후보 지지자들도 얼굴이 발개져 말을 아끼고 있었다.

이씨는 “지역주의를 타파하지 못한 선거였다는 게 좀 아쉽다. 새 대통령은 경제와 생활을 안정시키고 무엇보다도 약속을 지켰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가족들은 그제서야 조용히 TV를 보던 노령의 할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씨 가족의 선거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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