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평양의 봄]남북한 內治의 변화

  • 입력 2000년 4월 12일 19시 23분


‘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 자민련 조부영(趙富英)선거대책본부장의 악수.’

12일자 일간 신문들에 실린 이 한 장의 사진에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의미가 함축돼 있다. 비록 당 대 당의 공조 약속은 아니지만 양당의 ‘악수’에 실린 무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두 당은 97년 대선 이전에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주창한 ‘대통합의 정치’를 매개로, 대선 이후에는 내각제를 연결 고리로 연대 움직임이 있었으나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이번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위장 이혼’이니 ‘나라 망친 당’이니 하는 험구를 주고받던 두 당을 하루아침에 악수하게 만든 것은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외교 안보는 물론 내정에 미치는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두 당의 재빠른 악수에는 총선을 앞둔 ‘정략적’ 계산이 깔려 있는 게 사실. 여권의 분석 결과 남북정상회담은 서울과 경기 북부, 인천 강원 등의 지역에서 2∼5%의 지지율 상승을 가져왔다고 한다. 한나라당도 이런 관측에 고개를 끄덕인다. 불과 1000∼2000표로 당락이 갈리는 지역이 많은 수도권에서 2∼5%의 지지율 상승이라면 그 의미가 작을 수 없다.

이회창총재의 한 측근은 12일 “설령 남북정상회담이 직접 표심(票心)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선거 2, 3일을 앞두고 바람몰이를 통해 반여(反與) 성향의 부동표를 결집해야 하는 야당으로선 상당한 타격”이라고 말했다. 특히 지금처럼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제1당 자리를 놓고 각축하는 상황에서 5% 이내의 지지율 상승, 10석 이내의 판세 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

한나라당 일각의 우려대로 10석 이내 차이로 한나라당이 제2당으로 물러선다면 총선 이후 정국은 한바탕 소용돌이칠 것이 분명하다. 한나라당은 남북정상회담을 ‘총선용 신북풍’으로 몰아세울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 해도 여권은 제1당의 힘과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일 것인 만큼 정국 주도권은 여권 쪽으로 넘어갈 공산이 크다.

반대로 한나라당이 1당을 차지한다 해도 남북정상회담이 갖는 정치적 에너지는 무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여소야대와 레임덕에 시달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이 간단치 않은 버팀목이 될 수 있기 때문. 이렇게 효과적인 카드를, 그것도 카드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총선 직전에 내밀었다는 점에서 김대통령과 여권이 정국 주도권 장악에 한발 앞서간 측면이 있다.

북한도 이런 국내 정치 상황을 모를 리 없다. 이번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장관과 북한 송호경(宋浩景)아태평화위부위원장 간 사전 접촉 내용을 보더라도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이 이번 총선 국면 등 남한정국에 미치는 영향을 예의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이는 남한만의 문제는 아니다. 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시장에 내놓기로 작정한 것 자체가 엄청난 북한 내치(內治)의 변화를 예고한다. 김일성(金日成)과 같은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한 김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사후 신비주의적 ‘유훈(遺訓)통치’에 상당 부분 의존해온 게 사실.

그런 김국방위원장이 김대통령과 함께 정상회담이라는 ‘공개 경쟁 시장’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사실상 ‘신비주의 통치’의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이라는 게 남북관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는 더 이상 신비주의 통치가 먹혀들지 않을 정도로 북한 경제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뜻이지만, 역으로 말하면 더 이상 신비주의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김국방위원장의 통치 기반이 공고해졌다는 뜻도 된다. 최근 북-일 수교회담 재개 등에서 드러난 북한의 실리주의 추구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확실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란 게 정부 관계자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결국 남북의 정상회담 합의는 외곽의 지렛대를 활용해 정국 주도력을 공고히 하자는 김대중정부와 실리주의 추구로 경제 위기를 타개하려는 김정일정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나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남측이나 북측이나 내재된 복잡한 변수가 너무 많아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명분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박제균기자>phark@donga.com-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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