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서울 강서구 강서점자도서관에서 이상웅 씨가 직접 제작한 점자책을 들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하얀 종이 위에 부드럽게 솟은 점자를 보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점자가 모여 책이 완성될 때는 정말 감동적이죠. 점자책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22일 오전 서울 강서구 강서점자도서관에서는 이상웅 씨(48)가 점자 인쇄기로 장애인 정보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연거푸 걸려 오는 시각장애인들의 전화까지 받느라 분주했다. 법원에 가는데 동행해 달라는 시각장애인 할머니의 전화를 받자마자 이 씨는 비상이라도 걸린 듯 할머니 집으로 달려갔다가 몇 시간 뒤 돌아오기도 했다.
이 씨는 도서관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어 관장처럼 보이지만 평범한 은행원이다. 국민은행 전산부 23년차 직원인 그는 지난해 초부터 관장 역할을 하며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야간 근무를 하는 그는 이날도 전날 오후 5시부터 이날 오전 9시까지 일을 마친 뒤 바로 도서관에 나왔다. 격일 근무를 하는 탓에 아침에 근무가 끝나면 하루는 아예 잠을 자지 않고 도서관에 나와 일을 한 뒤 밤에 퇴근해 7시간가량 이틀 치 잠을 몰아 잔다. 아침이면 다시 도서관에 나와 출근시간인 오후 5시 직전까지 봉사 활동을 한다. 점자책 제작, 시각장애인 차량 이동 봉사, 청소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2005년 설립된 점자도서관은 지난해 3월 폐관 위기에 처했었다. 설립자가 재정 부족을 이유로 문을 닫으려 했던 것. 시각장애인들은 설립 당시부터 꾸준히 봉사활동을 했던 이 씨에게 “우리가 계속 책을 읽을 수 있게 도서관을 끌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선뜻 수락했다. 현재 관장은 1급 시각장애인이라 업무 수행에 다소 어려움이 있어 이 씨가 업무의 상당부분을 처리하고 있다. 그는 “점자를 찬찬히 짚어가며 책을 읽는 시각장애인들을 보면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씨의 고민은 늘 돈 문제다. 서울시 지원을 받고 있지만 올해 지원금은 3600만 원에 불과했다. 점자책 한 권을 만드는 데는 일반 책 5배의 비용이 드는 탓에 제작비와 임차료 등을 빼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그 바람에 그의 아내가 지난해 회사를 그만두고 ‘무보수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제작비가 모자라 의뢰받은 서적을 점자책으로 만들어 주지 못해 안타까웠던 적도 많다. 기자가 도서관을 방문한 이날도 난방기기가 고장 났지만 새로 살 돈이 없어 작은 온풍기 하나로 추위를 이기고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어렵게 행사 후원금 300만 원을 유치해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재능 콘서트’를 기획했다. 노래 악기 연주 등 예능 방면에서 재능이 뛰어난 시각장애인들이 안마사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그는 행사에 재능 있는 시각장애인들을 출연시킨 다음 출연료를 지급했다. 예능인을 직업으로 삼아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는 “도서관이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시각장애인들이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될 때까지 도서관을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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