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홍장과 담판하려던 김옥균
도쿄로 돌아왔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조선은 여전히 원세개와 민씨 일족이 장악하고 있었고, 일본은 청과 조선 정부를 의식해 계속 김옥균을 냉대했다. 일본에서 보낸 10년은 그에게는 문자 그대로 허송세월이었다. 나이도 어느덧 40대 중반이 되어 버렸다. 그를 도왔던 개화파도, 일본의 재야인사도 차츰 떨어져 나갔다. 1894년 3월 그나마 신변보호를 받을 수 있던 일본을 벗어나 사지나 다름없는 상하이로 건너간 것은 이를 돌파하기 위한 대도박이었다.
박영효 암살 미수도 이용한 日

그런데 당시 일본에는 김옥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개화파 인사 박영효가 있었다. 철종의 부마로 왕실의 일원이면서 갑신정변에 주역으로 참여했으니, 그에 대한 고종과 민씨들의 원한도 깊었다. 김옥균뿐 아니라 박영효의 목까지 손에 넣는다면 이일식은 그야말로 조선 정부의 영웅이 될 것이었다. 김옥균 암살 소식이 전해지면 박영효 암살은 어려워질 것이니 서둘러 암살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 수하들을 확보한 뒤 자신의 거처로 박영효를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낌새를 챈 박영효가 움직이지 않자 그의 거처로 갔다가 오히려 박과 그 동지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도쿄에서 열린 박영효 암살 미수사건 재판은 일본 언론의 지대한 관심 속에 두 달여간 진행되었다. 때마침 김옥균 암살과 그 시체가 조선으로 이송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재판정은 조선정부 규탄과 청과의 개전을 선동하는 장이 돼 버렸다. 재판 끝에 이일식은 무죄석방 되었다(김영작, ‘누가, 왜 김옥균을 죽였는가: 흑막에 가려져 온 김옥균 암살의 진상’). 재판에서는 이일식이 소지하고 있던 고종의 옥새와 밀지가 위조라는 것이 밝혀졌다. 김옥균 암살을 지령한 게 아닌가 하는 비난에 직면해 있던 조선 정부는 혐의를 벗었으니 손대지 않고 코 푸는 데 성공한 것이다.
김옥균 암살을 반긴 조선 조정
한편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은 원세개는 즉각 홍종우를 보호하라는 급전을 청 정부에 보냈다. 오가사와라 유배 시절 김옥균을 만나 상하이까지 따라온 섬 소년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는 김옥균의 시체를 일본에 가져가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이미 원세개의 요청을 받은 상하이 당국은 김옥균의 시체를 조선 측에 넘겼다. 홍종우는 김옥균 시체를 조선행 배에 태우고 의기양양하게 귀국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불법에 대해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는 침묵했다. 자기가 신임 총영사라 부임하자마자 외교적 항의를 하기가 적절치 않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에서였다.
김옥균의 죽음에 일본에서는 호외가 발행되는 등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청과 조선이 김옥균을 죽였다며 분노를 표출했다. 이런 여론이 몇 달 뒤 청일전쟁 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영작 교수는 일본 당국이 김옥균 암살범들의 동향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점, 그리고 정계 거물로 암살 모의에 간여한 오미와 조베에(大三輪長兵衛)를 일본 정부가 끝까지 싸고 돈 점 등을 들어 일본 정부가 김옥균 암살을 방치, 방조했다고 주장한다(김영작, ‘누가, 왜 김옥균을 죽였는가: 흑막에 가려져 온 김옥균 암살의 진상’). 김옥균에게는 한중일 삼국 정부가 다 적이었다.
서울 주재 외교관들은 김옥균의 시체를 훼손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다른 재주는 없어도 국왕과 민씨들의 맘을 읽는 데에는 도사이던 조정 신하들은 능지처참하라는 상소를 잇달아 올렸다. 이들은 김옥균이 인조와 영조 때 반역사건을 일으킨 이괄(李适)과 신치운(申致雲)보다 더한 대역죄를 저질렀다며 시체에 대한 추벌(追罰)을 주장했다. 왕이 이를 ‘가납(嘉納)’했다. 고종은 이를 대경사라며 종묘에 고하고 문무백관의 진하(進賀)를 받으며 특별사면을 실시했다. 갈기갈기 찢긴 김옥균의 시체를 안주 삼아 잔치를 벌이던 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전주를 함락시키고 있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