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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소수의 의견[이정향의 오후 3시]

이정향 영화감독
입력 2021-12-08 03:00업데이트 2021-12-0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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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리차드 쥬얼’
이정향 영화감독
1996년 7월 27일, 올림픽이 한창인 미국 애틀랜타의 올림픽 공원에서 수상한 배낭이 발견된다. 신고자는 보안 경비원인 34세의 리차드 쥬얼. 지나치게 비만인 몸매에, 만사를 요령 없이 행하는 성격 탓에 멍청이로 취급받기 일쑤라 이 배낭 건도 묵살됐으나, 그가 원리원칙을 고수하며 우긴 덕에 배낭 속 폭탄이 터지기 직전에 시민들을 대피시킬 수 있었다. 경찰이 돼 시민을 보호하는 게 꿈이었던 그는 순식간에 국민 영웅으로 등극한다. 홀몸으로 빠듯하게 아들과 살아 온 노모도 이보다 행복할 순 없다. 하지만 사흘 만에 쥬얼은 영웅이 되고파 자작극을 벌인 테러범으로 전락한다.

연방수사국(FBI)은 범인을 빨리 잡지 않으면 올림픽과 국가 이미지가 치명상을 입기에 조급해진다. 최초 신고자인 쥬얼을 용의선상 일순위에 두고 비밀 수사를 하던 중, FBI 요원이 특종을 찾아 헤매는 여기자에게 성 접대를 받고 정보를 흘린다. 그녀가 쓴 신문기사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이제 FBI는 쥬얼을 범인으로 특정하지 않으면 망신을 당할 처지라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가 있는데도 쥬얼과 노모의 삶을 망가뜨리며 그를 테러리스트로 몰아간다.

경찰이 되고팠던 쥬얼은 자신을 수사하는 이들에게조차 법을 집행하는 자들에 대한 예우와 존경심을 표하며 성실히 협조한다. 하지만 자기보다 모자란 놈이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는 꼴을 인정하기 싫은 엘리트 수사관들의 시기심은 쥬얼의 순진함과 정의감을 영웅주의에 빠진 테러리스트의 필수조건으로 확신하며 그의 선의를 짓밟는다. 수사에 협조적일수록 자신이 불리해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순히 당해 주던 쥬얼이 마지막에 딱 한 번 항변한다. 그를 얼간이 취급하던 FBI는 말문이 막힌다. 쥬얼이 평생 지켜온 고지식함의 힘이다. FBI는 3개월 후 증거 불충분으로 그를 용의선상에서 해제하지만 여전히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쥬얼이 이미 온 국민의 역적이 된 후다.

6년 후, 진범이 잡힌다. 쥬얼은 보안관으로 새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간의 고생 때문인지 누명을 벗은 지 5년 만에 당뇨로 인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다. 겨우 마흔다섯 살이었다. 리차드 쥬얼이 원한 건 보상도, 영웅 대접도 아닌 단지 테러리스트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는 거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아흔이 다 된 나이에 공권력에 희생된 한 인물의 실화를 찬찬히 조명했다. 주인공을 맡은 무명 배우 폴 월터 하우저의 연기도 대단하다. 정부와 언론이 한목소리를 낼 때도 그들과 다른 소리를 내는 소수의 의견에 귀 기울여 보자. 오히려 진실일 때도 있다. 그 당시, 미치광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쥬얼을 믿고 응원한 이들도 있었다.

이정향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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