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요청 받은 경찰이 구조요청 한다며 도망쳤다 [광화문에서/신광영]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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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차장
신광영 사회부 차장
두 경찰관은 빌라 2층 계단에서 마주쳤다.

신입 순경은 3층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경력 20년 차인 경위는 올라가던 길이었다. 몇 초 전 3층에선 비명이 울렸다. 윗집 남자가 흉기로 엄마의 목을 찌르는 것을 보고 딸이 외친 소리였다. 그 광경을 본 순경이 아래로 내달리다 선임자와 계단에서 조우한 것이다.

경위 옆에 있던 피해 여성의 남편은 “빨리 올라가자”고 재촉했다. 경위에겐 권총이, 순경에겐 테이저건이 있었다. 하지만 두 경찰관은 1층으로 내려가 빌라 밖으로 나갔다.

남편은 혼자 3층에 올라갔다. 한 평 남짓한 집 앞 복도에 부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딸은 그 좁은 곳에서 흉기 공격을 받고 있었다. 남편은 칼을 든 남자를 맨손으로 제압하면서 여러 곳을 찔렸다.

15일 발생한 인천 흉기 난동 사건은 112 신고자가 흉기에 찔리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출동 경찰관이 등을 돌린 사건이다. 경찰의 부실 대응이 그동안 적잖이 있었지만 대부분 무능과 미숙함, 후진적 치안 시스템의 문제였다. 이번처럼 시민을 구하려는 의지 자체를 포기했던 전례는 찾기 어렵다.

경찰관이라면 흉악범을 간단히 제압하지는 못하더라도 시민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것이라는 최소한의 기대가 무너진 것이다. 범죄자가 경찰을 두려워하는 건 나를 알아보는 순간 어떻게든 잡으려 들 것이라는 걱정 때문인데 그런 전제마저 흔들리게 됐다.

두 경찰관은 현장을 벗어난 이유에 대해 “구조 요청을 하려 했다”고 해명했다. 세월호 사건 당시 침몰하는 배에 승객들을 놔둔 채 ‘나 홀로 탈출’을 한 선장과 선원들이 “해경에 구조 요청을 했다”고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건 후 경찰은 교육 훈련 강화, 매뉴얼 정비 등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필요한 조치이긴 하지만 사건 현장은 예측이 불가능해 언제든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걸 메우는 것은 결국 출동 경찰관의 직업의식과 희생정신이다.

평범한 시민도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구조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2019년 경남 진주시의 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안인득 방화 살인 사건’ 때 관리사무소 수습 직원이 많은 주민을 살렸다. 당시 안인득은 아파트 4층 집에 불을 낸 뒤 연기를 피해 1층으로 내려오는 주민들을 노렸다. 이 직원은 안인득이 휘두른 흉기에 찔린 뒤에도 꼭대기층(10층)까지 집집마다 다니며 “아래로 가면 안 된다”고 알렸다.

관리실 수습 직원도 긴급 상황에선 이 같은 직업정신을 발휘한다. 하물며 경찰이 112 신고자가 칼에 찔리는 것을 보고도 외면한다면 정부가 경찰관을 제대로 선발해 훈련시키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경찰관 채용제도가 직업의식과 사명감을 검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찰 공무원 채용 때 영어, 한국사, 형법 등 필기시험 비중이 50%를 차지한다. 지식 습득 능력이 당락을 좌우한다. 미국, 캐나다 등 외국에도 필기시험이 있다. 하지만 실제 현장 상황을 제시한 뒤 지도 이해, 몽타주 식별, 용의자와 증인 찾기 등 직무 적성을 주로 평가한다. 특히 지원자의 주변인, 고교 시절 교사, 대학교수 등을 면담해 지원자의 성향이 경찰 업무에 맞는지 수개월간 자질을 검증한다.

이번 사건으로 비난 여론이 커지자 일부 경찰관은 “우리도 직장인”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들 역시 한 가정의 가장이자 소중한 생명인 것은 맞다. 하지만 경찰이 정년과 연금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장으로 그친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경찰관은 모두가 뒷걸음질 칠 때 의연하게 위협에 맞서는 직업인이다. 이 당연한 전제를 다시 세워야 하는 과제가 경찰 앞에 놓여있다.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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