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평인]김정은, 생뚱맞은 주적론

송평인 논설위원 입력 2021-10-13 03:00수정 2021-10-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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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노무현 정권 시절 국방백서에서 ‘주적’이란 표현을 삭제했다. 이후 보수 정권에서 되살리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적(primary enemy) 대신 가장 주요한 위협(primary threat) 등의 표현을 썼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우리가 주적이란 말을 쓰든 가장 주요한 위협이란 말을 쓰든 실제 군사적 현실의 주적은 북한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주적이란 말을 쓰든 안 쓰든 실제 군사적 현실의 주적이 한국과 미국인 것은 변함없다.

▷10일은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일이었다. 북한은 이날 주로 열병식을 개최해 왔다. 그러나 올해는 김정은이 열병식에 참가했다는 보도는 없고 국방발전전람회에 참가했다는 보도만 있어 열병식 대신 일종의 무기전람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그 자리에서 지난달 시험발사한 극초음속미사일(화성-8형) 등 최신 무기를 망라해 보여준 뒤 국방력 강화를 핵심 국가정책으로 천명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나 미국 등 특정한 어느 국가나 세력이 아니다”라는 주적론을 펼쳤다.

▷김정은의 그날 주적론은 생뚱맞은 측면이 있다. 우선 그날의 무력 과시 기조와 맞지 않는다. 게다가 김정은은 올 1월 당 대회에서만 해도 “최대의 주적인 미국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 지향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인 2017년에는 주민들을 상대로 ‘남조선은 우리의 주적’이라는 사상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북한 정권의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남북 대화, 북-미 대화 재개를 의식한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김정은의 주적론 립서비스가 최근 미국 정부의 대북 정보기관 코리아미션센터(KMC) 해체에 호응하는 태도 변화라는 분석도 있지만 영변 핵시설 원자로 재가동 의혹에 대한 국제사회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이라는 상반된 분석도 있다. 다만 그 의도가 어떠하든 ‘주적은 전쟁 그 자체’라는 말은 무기를 녹여 쟁기를 만든 성인군자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최소한 한반도 비핵화의 대의(大義)를 거슬러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 고도화를 꾀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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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적이란 표현의 삭제가 평화를 가져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주적은 전쟁 그 자체’라는 말이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거나 한국이 핵무기 통제권을 얻어 남북이 서로에 대해 대등한 군사적 억제력을 확보한 위에서만 함께 뜻을 모아 전쟁 그 자체를 주적으로 삼는 한반도 평화의 추구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김정은#주적론#생뚱맞은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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